요즘 <참교육>이란 드라마가 여러모로 화제다. 글로벌 수준의 인기도 화제이고, 교권보호국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도 화제고, 실제 교육 현장을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점도 화제다. 이런 화제에 이끌려 드라마의 보게 되었는데, 학부모의 갑질이 에피소드인 편을 보다가 갑자기 어떤 학부모가 선생님에게 “선생님, 애 있어요? 아이는 낳아 봤어요?”라고 했다는 막말이 생각났다.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부모 마음을 헤아려 학생들을 교육 할 수 있겠느냐?’라는 의미의 이 막말은 경험하지 못했으면 전문가가 될 수 없는 거 아니냐는 아주 오랜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조사 업계에 입문해 새내기 조사연구원의 때를 벗었다고 생각한 입사 2년 차의 어느 날, 분유 제품 관련 마케팅 조사에 합류했다. 지금은 그로부터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클라이언트와의 첫 미팅이 진행된 회의실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클라이언트는 참여 연구원 명단을 보다가 눈을 들어 이렇게 나에게 물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미혼이라서 육아 경험도 없는데, 분유 제품에 대해 좀 아시나요? 아무래도 이런 조사를 하려면 육아 경험이 있는 연구원이 이해도가 높을 거 같은데.”
물론 프로젝트의 핵심 역할을 하는 선배 연구원들은 모두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으니 그 자리에서는 그냥 반농담의 분위기로 넘어가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성조사도 포함되는 프로젝트이니 스스로 생각해도 역시 육아 경험이 있으면 훨씬 생생한 소비자의 목소리를 조사결과에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아무래도 조사를 진행하면서도 경험을 활용한 장점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회의가 끝나고 저녁을 먹다가 선배 한 분에게 회의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 얼마 전에 기저귀 제품 조사에 참여했잖아. 그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제품을 사용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기저귀를 차고 있었던 적도 있었어. 직접 경험을 해보니 그냥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긴 하더라.”
2026년 오늘과는 달리, 1980년대나 1990년의 조사 현장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공기가 있었다. 클라이언트와 조사연구원 사이의 일종의 기싸움이라고나 할까. 특히 조사 주제나 대상과 관련된 경험이 없는 연구원은 클라이언트로부터 신뢰를 얻기 어렵기도 했다.
조사결과의 숫자는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과연 소비자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경험에 기반한 정보와 지식을 조사연구원이 갖추고 있는가를 탐색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많았다. 그때 조사연구원들이 클라이언트에게 종종 듣던 뼈아픈 피드백 중 하나는 바로 “현실을 모른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사연구원의 경험이 없느니 현실을 모를 테고, 그런 연구원이 만든 보고서는 신뢰하기 어려우니 가능하면 경험이 있는 연구원을 투입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클라이언트도 있었다.
그 시절의 기준에서 보면, 조사연구원의 전문성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보다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경험하며 살아봤는가’에 더 가까웠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 기준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떤 제품을 쓰고, 어떤 상황을 겪고, 어떤 감정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6년의 지금, 우리는 다른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조사연구원은 정말로 모든 것을 살아본 사람이어야 할까?”라는 질문.
최근 몇 년 사이, 우리가 다루는 시장은 훨씬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복잡하게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논알콜·저도주 시장을 보자.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대체재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술을 안 마시는 선택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여기에는 건강, 자기관리, 사회적 이미지, 관계의 방식까지 다양한 의미가 얽혀 있다.
이 시장을 조사할 때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연구원이 더 적합하다”라거나 “실제로 음주 문화를 경험한 연구원이 필요하다”라는 식의 구분은 현실적이지 않다.
왜냐면 이 시장은 단순히 ‘술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OTT 콘텐츠 소비도 마찬가지다.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헤비 유저의 경험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서는 오히려 “왜 끝까지 보지 않는가?”, “왜 추천 콘텐츠를 무시하는가?”, “왜 구독을 해지하는가?”와 같은 비경험 혹은 중단의 경험이 더 중요한 인사이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AI 서비스 역시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다. 생성형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용자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사용자 사이에는 단순한 사용 빈도의 차이를 넘어, 기술에 대한 신뢰, 통제감, 그리고 자기 효능감에 대한 인식 차이가 존재한다.
이때 조사연구원에게 필요한 능력은 직접 헤비 유저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용자 집단의 경험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이해하느냐다.
이처럼 오늘날의 시장은 ‘경험의 유무’보다 ‘경험의 해석’이 더 중요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조사연구원이 모든 소비자 삶을 살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최근 주목받는 시니어 시장이나 특정 질환 관련 헬스케어 시장처럼, 생애주기나 신체적 조건이 중요한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시니어 대상 디지털 서비스 조사를 수행한다고 가정해 보자. 젊은 연구원이 아무리 노력해도 노화라는 경험 자체를 완전히 체화할 수는 없다.
결국, 조사연구원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직접 해보는 경험, 그 자체가 아니다. 스스로 겪어보지 않은 세계라 할지라도, 타인의 삶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 바로 깊고 다정한 ‘간접경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노화를 경험하지 못했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조사연구원은 어떤 방식으로 간접경험을 쌓고 활용하여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걸까?

우선, 활자 너머의 감정에 접속하는 ‘디지털 인류학자’가 되어보아야 한다. 요즘은 소비자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창구가 너무나 많다. 맘카페, 익명 커뮤니티, 브이로그(Vlog),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해시태그들은 거대한 인류학적 관찰의 장인 셈이다. 조사연구원은 단순히 ‘어떤 헬스 케어 제품이 많이 언급되는가’를 크롤링(Crawling)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새벽 3시에 맘카페에 올라온 “애가 분유를 토하는데 어떡하죠 ㅠㅠ”라는 글을 읽으며, 화면 너머 어머니의 떨리는 손과 초조한 마음을 함께 느껴야 한다. 텍스트 사이에 배어 있는 불안, 기쁨, 안도감을 채집하는 것이 간접경험의 첫걸음이다.
두 번째는 일상을 연구실로 만드는 ‘미시적 관찰’을 평소 몸에 익혀야 한다. 마트에 갔을 때 분유 코너에서 엄마들이 분유통을 집어 들고 가장 먼저 어디를 보는지(영양 성분표인지, 원산지인지, 아니면 가격표인지),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검색하며 비교하는지를 조용히 관찰해보자. 때로는 지인의 육아 현장에 방문해 분유를 타는 과정을 지켜보고, 젖병을 흔들 때 손목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지, 물 온도를 맞추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보자. 이러한 미시적 관찰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것 못지않은 강력한 잔상을 남길 것이다.
세 번째는 이종(異種) 경험을 결합해 보고 유추하는 연습이다. 분유를 타본 적은 없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지극히 돌보며 애태워본 경험들이 있다. 반려동물이 아파서 밤새 간호하며 가장 좋은 사료를 찾았던 경험, 혹은 나이 드신 부모님을 위해 성분을 꼼꼼히 따져 영양제를 고르던 경험처럼. 결국, 절대적인 사랑과 책임을 담아 누군가의 먹거리를 고르는 마음이라는 본질은 같은 것이다. 자신이 가진 다른 영역의 짙은 경험을 조사 주제에 투영하고 유추하는 능력, 이것이 훌륭한 연구원이 간접경험을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쌓여서 활용되는 간접경험은 그럼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이렇게 정성껏 쌓아 올린 간접경험은 그저 연구원의 머릿속에만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움직이고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보고서라는 결과물에 어떻게 해서든 녹여내야 한다.
우선 연구원들은 간접경험을 숫자에 체온을 더하는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야 한다. 데이터가 “A 브랜드 분유의 물에 잘 녹는 용해도에 대한 만족도가 45%로 1위입니다”라고 말할 때, 간접경험이 없는 연구원은 이 문장을 그대로 보고서에 쓰겠지만, 간접경험을 깊이 쌓은 연구원은 아마도 다르게 쓸 것이다. 아래의 경우처럼.
“새벽 3시, 잠투정하는 아이를 한쪽 팔로 안고 남은 한 손으로 분유를 타야 하는 엄마들에게 용해도는 단순한 기능이 아닙니다. 덩어리진 분유를 흔들어 녹이느라 아이의 울음이 길어지는 1분 1초는 엄마에게 죄책감과 스트레스입니다. A 브랜드는 스르르 녹아내리는 용해도를 통해 새벽 육아의 고단함을 덜어주었고, 이것이 만족도 1위의 진짜 이유입니다.”
이렇게 숫자에 소비자의 체온과 땀방울을 더할 때, 조사결과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조사결과에서 ‘What’을 넘어 ‘Why’를 찾아내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간접경험은 데이터의 이면을 보게 한다. 설문조사에서 유기농 성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답한 비율이 높더라도, 실제 매대에서는 가격 할인을 하는 일반 분유가 잘 팔리는 현상(What)을 마주했을 때, 연구원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깊이 이해한 연구원은 그 간극(Why)을 읽어낼 수 있다. 아이에게 최고만 주고 싶은 엄마의 이상과 팍팍한 가계부라는 가장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비자의 심리를 분석에 반영하여, 보다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마케팅 전략을 클라이언트에게 제안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클라이언트와의 공감대 형성에 도움을 준다. 보고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풍부한 간접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구원의 언어는 클라이언트의 끄덕임을 이끌어낼 수 있다. 미혼의 연구원이 만약 소비자의 일상을 꿰뚫어 보는 생생한 묘사와 함께 데이터를 풀어냈다면, 클라이언트 역시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어도, 우리 고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군요!”라며 감탄할 것이다. 결국, 조사결과의 설득력은 연구원이 소비자의 삶에 얼마나 깊이 공감했는가를 보여주는 태도에서 완성된다.
가끔 조사연구원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직업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마치 타인의 인생을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내 인생은 하나뿐인데 직업을 통해 매달 새로운 사람의 삶을 살아내야 하니까 말이다.
이번 달에는 이제 막 면허를 딴 20대 대학생의 설렘을 이해해야 하고, 다음 달에는 은퇴 자금을 굴리는 60대 가장의 불안감을 안아야 하며, 그다음 달에는 아이의 작은 발진 하나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초보 엄마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조사가, 우리의 분석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연구원의 진짜 자격은 직접 해본 물리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 필요와 결핍에 깊이 주파수를 맞추는 ‘공감의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은 여전히 강력한 자산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수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조사연구원에게 더 필요한 것은, 경험의 유무를 넘어서는 ‘이해의 기술’이다.
타인의 삶을 관찰하고, 질문하고, 재구성하고, 검증하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전제로 더 깊이 들어가는 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살아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신 우리는 더 많은 삶을 이해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시대에서 조사연구원의 일은 세상을 대신 살아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연결하고, 그것을 의미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그 번역의 출발점은 경험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려는 집요한 호기심일 것이다.
_ 이완정_『외로움의 함정』 저자/(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