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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Lounge_23] 수신 거부의 시대, 우린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나?

서울 영등포구의 한 리서치 전문 회사. 7년 차 조사 연구원 김민준 대리의 책상 위에는 식어버린 아메리카노와 모니터를 가득 채운 통계 프로그램 화면, 그리고 빨간색 스티커가 빽빽하게 붙은 통화 기록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고객님이 전화기를 꺼놓아 ooo으로 연결되며…."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기계음은 오늘만 벌써 스무 번째다. 김 대리가 담당하는 프로젝트는 한 지방자치단체의 ‘지역 주민 삶의 질 및 정책 만족도 조사’. 표본 크기는 1,000명, 조사 기한은 불과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김 대리의 모니터 하단에 떠 있는 진행률 수치는 잔인하게도 ‘38.2%’에 머물러 있다.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응답자 수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수집된 382명의 데이터를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스크린 속 그래프는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60대 이상 여성 응답자는 이미 목표 표본 수를 200% 초과 달성해 접수를 조기 마감(Quota Close)했지만, ‘2030세대 남성’과 ‘30대 워킹맘’ 카테고리는 탈모가 진행된 머리처럼 듬성듬성 비어 있다."김 대리, 20대 남성 표본 아직도 15명밖에 안 채워졌어? 모레가 중간보고인데 이거 어쩔 거야?"팀장의 찌푸린 미간을 보며 김 대리는 속으로 한숨을 삼킨다. 20대 남성의 스마트폰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는 순간 스팸 차단 앱에 의해 ‘광고/협박’ 수준으로 자동 스크리닝된다. 간신히 연결되더라도 “바쁩니다”라는 차가운 한마디와 함께 끊어지기 일쑤다.방문 조사는 사정이 더 나쁘다. 지난 주말, 면접원들을 현장에 보냈지만 아파트 단지 입구의 공동현관기 앞에서 경비원과 입주민들의 눈총을 받으며 쫓겨나기 일쑤였다. “남의 집에 함부로 찾아와서 개인정보를 물어보느냐!”라며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소동까지 벌어졌을 정도다.지금 대한민국 리서치 현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과연 ‘진짜 국민’과 ‘진짜 소비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일까?리서치 현장에서 지금 이런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다.“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과거 조사회사 연구원들에게 전화조사와 방문면접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통적 쌍두마차였다. 전화번호부나 RDD(임의전화걸기) 방식을 통해 전국의 가구에 접근하고, 숙련된 면접원이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응답자의 눈빛과 표정까지 읽어내던 시절이 있었다.하지만 지금 현장의 모습은 그 시절과는 180도 달라졌다.우선 집 전화 한 대의 시대에서 개인별 한 대의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지만 전화로 응답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스팸 차단 앱과 수신 거부라는 강력한 무기에 의해서 응답을 바라는 연구원들의 목소리는 차단당하기 일쑤다. 스마트폰 이용자의 대다수가 ‘T전화’, ‘후후’, ‘티스팸’ 같은 스팸 차단 앱을 사용한다. 조사회사의 전화번호는 시스템에 의해 ‘광고/설문’으로 분류되어 화면에 띄워지기도 전에 차단되기도 한다.여기에 느닷없이 걸려 오는 모르는 발신자로부터의 전화를 두려워하는 ‘콜 포비아(Call Phobia)’도 한몫한다. 특히 2030 세대에게 예고 없는 전화는 실례이자 공포다. 친한 친구끼리도 텍스트 메시지로 먼저 의사를 묻고 통화하는 시대에, 모르는 번호의 조사 전화에 응할 리가 만무하다.방문면접의 경우는 전화보다 더 심하다. 방문 조사의 거점이었던 아파트 단지는 스피드 게이트와 공동현관 보안 장치로 철통 봉쇄되었다. 게다가 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려는 선택적 단절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낯선 면접원의 방문은 사생활 침해를 넘어 안전 위협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보안 시스템과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면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현재 국내 전화조사의 실제 응답률은 한 자릿수(3~8%)대로 추락했다. 100명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최소 1,000명, 많게는 3,000명 이상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지독한 ‘확률과의 싸움’이 매일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응답률 급감보다 연구원들을 더 깊은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바로 ‘표본의 편향(Sample Bias)’ 문제이다.통계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모든 구성원이 조사 대상에 포함될 확률이 동일해야 한다’라는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사를 ‘잘 받아주는 계층’과 ‘절대 안 받는 계층’으로 극명하게 갈라진다.응답을 잘 받아주는 계층은 주로 시간적 여유가 상대적으로 많고, 정치·사회적 이슈에 의견을 표출하고 싶어 하는 60대 이상 장년층, 전업주부, 자영업자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이와 반대로 응답을 절대 안 받는 계층은 직장 생활로 바쁜 3040세대, 1인 가구, 개인정보 유출에 민감한 고소득층, 그리고 20대 남성이다.김 대리가 다루는 데이터에도 이 왜곡이 그대로 반영된다. 20대 대학생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기를 붙잡고 있으면, 결국 연결되는 사람은 ‘낮 시간대에 한가롭게 전화를 받을 수 있는 극소수의 20대’뿐이다. 과연 이 5%의 응답자가 전체 20대의 생각과 가치관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AI생성 이미지부족한 표본을 채우기 위해 가중치(Weighting) 기법을 사용하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다. 응답자가 10명밖에 없는 20대 남성 데이터에 가중치 5를 곱해 50명으로 뻥튀기하는 순간, 특이한 성향을 지닌 1명의 목소리가 5명의 목소리로 과대 포장되는 착시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자 그럼 이 사태를 조사회사들은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는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대표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생존에 위협을 받으니, 조사회사들도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데이터의 정확도가 곧 생명인 조사회사와 연구원들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과 기법을 쏟아내고 있다. 어떤 대응을 하고 있는지 몇 가지 알아보자.우선 어느 한 가지 조사 방식만으로는 절대 대표성을 얻을 수 없다는 반성에서 출발한, 혼합 조사 기법(Mixed Mode Survey)의 고도화 대응이다. 전화조사로 60대 이상 표본을 채우고, 동일한 설문지를 웹/모바일 응답 링크(URL) 형태로 전환해 2040세대에게 문자메시지나 카카오톡으로 발송한다. 기기에 친숙한 젊은 층은 모바일 화면으로 빠르게 응답하고, 고령층은 구술로 응답함으로써 각 매체의 단점을 서로 보완하는 형태다.두 번째 대응으로는 모바일 패널(Panel) 생태계 구축과 품질 관리를 들 수 있다. 랜덤 조사(RDD)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전에 리워드와 이용 동의를 받은 수백만 명 규모의 모바일 패널을 확보하는 데 사운을 걸고 있다. 하지만 패널 조사 역시 ‘체리피커(리워드만 노리고 대충 응답하는 사람들)’나 ‘AI 불성실 응답’이라는 난관에 봉착해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연구원들은 응답 시간이 지나치게 짧은 데이터나, 모든 문항에 똑같은 번호를 찍는(Straight-lining) 데이터를 걸러내는 ‘행동 기반 신뢰도 스코어링 알고리즘’을 도입해 품질을 실시간 검증하기도 한다.마지막으로는 이전에도 활용되던 것이긴 하지만, 이전보다 고급 통계적 보정 기법(Propensity Score & Data Stitching)을 활용하는 대응이다. 단순 성·연령·지역 가중치를 넘어, 응답자의 성향과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무응답 편향을 보정하는 고급 통계 모형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 설문 응답 결과에 카드 결제 내역이나 통신사 위치 데이터 등 실제 행동 데이터(Behavior Data)를 결합하여, 응답자가 말한 내용(Attitude)의 실제 신뢰성을 다각도로 검증하는 방식이다.그렇다면 이 ‘응답 거부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는 시대에 리서치 업계의 미래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아마도 앞으로의 변화는 단순한 조사 기법의 개선을 넘어, 리서치라는 산업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그 방향은 어떤 방향일까.우선 첫째, ‘묻는 조사(Ask)’에서 ‘관찰하는 조사(Observe)’로 전환하지 않을까 한다. 소비자에게 “이 제품을 살 의향이 있습니까?”라고 직접 물어보는 방식은 아마도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대신 소비자의 동의하에 비식별화된 웹 서핑 이력, 앱 사용 시간, 결제 데이터, SNS 언급량 등 ‘디지털 발자국(Digital Footprint)’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분석하는 행동 기반 분석이 시장 조사의 메인스트림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말은 거짓말을 하지만, 결제 내역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둘째로는 이전 컬럼에서 몇 번 다루었던 내용으로, 생성형 AI와 합성 데이터(Synthetic Data)의 보완적 활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도 진짜 사람의 응답을 얻기 힘든 마당에 앞으로도 더욱 그러할 테고, 그렇게 생긴 응답자의 빈자리를 AI가 채우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존에 축적된 거대한 인구통계학적 데이터와 소비 패턴을 학습한 ‘AI 페르소나’를 생성하고, 이들에게 가상의 시나리오를 제시하여 반응을 예측하는 ‘합성 소비 트렌드’ 또는 ‘합성 소비자’ 분석이 활성화될 전망이다. 이는 인간 조사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표본이 극히 부족한 특수 계층의 응답을 보완하는 통계적 예측 도구로 쓰이게 될 것이다.세 번째로는 ‘질문의 격(Quality of Question)’과 ‘해석의 가치’가 상승할 것이다. 이 부분도 이전의 컬럼에서 몇 번 다룬 적이 있다. 응답자의 목소리를 듣기 힘들어질수록, 한 번의 조사에서 얻어내는 데이터 단 한 조각의 가치는 더욱 귀해진다. 길고 지루한 50문항짜리 설문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1~2분 안에 직관적으로 답할 수 있는 Micro-survey가 대세를 이루지 않을까 한다.위에서 언급한 흐름을 고려한다면 연구원의 역할도 역시 설문지를 만들고 데이터를 집계하는 사람에서, 파편화된 수많은 데이터 조각을 모아 인간의 진심과 맥락을 읽어내는 데이터 텔러(Data Teller)로 진화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후 6시 30분. 마침내 20대 남성 표본 50명 중 마지막 1명의 모바일 응답이 시스템에 들어왔다. 김 대리의 모니터에 초록색 완료 불빛이 들어온다.퇴근길 지옥철에 몸을 실은 김 대리가 고개를 들어 보니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수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저마다의 디지털 세계에 몰입해 있다. 저들 중 누구도 낯선 전화에 응답하거나 벨 소리에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김 대리는 안다. 차갑게 꺼져 있는 저 화면들 너머에도 여전히 삶의 고충이 있고,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으며, 더 나은 제품에 대한 열망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조사 연구원의 일은 이제 단순히 전화를 걸고 벨을 누르는 것이 아니다. 단단하게 닫힌 디지털의 장벽을 넘어, 그들의 진짜 목소리에 닿을 수 있는 새롭고 따뜻한 통로를 만들어내는 일. 수신 거부의 시대에 리서처가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더 깊어지고, 더 세심해져야만 한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 관리자
  • 26.10.14
  • 32
[Trend Insight_23] 편의점을 점령한 문학, '민음사 빵'이 던지는 질문

“오전 9시, 10시 사이에 들어오는데 그때 오셔야 있어요.”요즘 서울의 한 편의점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한다. 편의점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은 신상 라면도, 인기 도시락도 아니다. 하물며, 단종됐다가 재출시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포켓몬빵’이나 ‘먹태먹물빵’의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이 찾는 건 3,700원짜리 빵 한 봉지, 이른바 ‘민음사 빵’이라 불리는 무언가이다.민음사 빵이 입고 되자마자 품절 대란을 빚다 보니, 연차를 내고 편의점을 순회했다는 사람, 점장과 친해져 입고 시간을 미리 귀띔받는다는 사람, 원하는 상품이 나올 때까지 하루에 몇 번씩 같은 편의점을 들락거리는 사람까지 등장했다.이런 빵 하나를 두고 벌어지는 이 진풍경은 단순한 먹거리 유행을 넘어, 지금 한국 소비 문화의 흥미로운 단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늘 컬럼에서는 이 민음사 빵의 열풍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함께 알아보려고 한다. ‘민음사 빵’ 열풍의 발단은 편의점 GS25와 출판사 민음사의 협업이었다. GS25는 민음사, 캐릭터 브랜드 ‘오늘의 귀여움’과 손잡고 세계문학전집과 시집의 표지를 그대로 패키지에 옮긴 빵 시리즈를 선보였다. 깨찰빵과 모카번 두 라인으로, 《사랑에 대하여》, 《오만과 편견》, 《늑대처럼 싱싱하게 울고 싶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등 문학 작품의 제목과 표지가 그대로 포장지에 담겼다.*스마트폰앱 ‘우리동네GS’의 이벤트 이미지 캡쳐*앱에서 주변 편의점의 ‘민음사 빵’ 재고가 없음을 나타내는 지도그런데 이 빵에 대한 소비자 반응은 당초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출시 3일 만에 5만 개가 팔리며 매출 약 1억 5,000만 원을 기록했고, 이는 GS25 전체 빵 상품 중 매출 1·2위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후로도 인기는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높아갔다. 출시 4주만에 누적 판매량이 100만개를 돌파했고 하루 매출 1억원을 달성했다. 매장 재고를 확인할 수 있는 GS25 자사 앱 ‘우리동네GS’의 가입자 수는 이 기간 2.5배나 늘어났을 정도이다. 이 정도면 단순한 히트 상품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 부를 만하다.이 열기는 편의점 매대를 넘어 중고거래 시장으로까지 번졌다. 빵과 함께 무작위로 들어 있는 투명 책갈피가 대상이었다. 세계문학전집 표지를 활용한 책갈피 15종과 시집을 활용한 5종, 총 20종에 GS25 단독 한정판 3종까지 더해지면서, 원하는 책갈피를 얻기 위해 같은 상품을 여러 번 구입하는 소비자가 늘었고, 중복으로 나온 책갈피는 당근마켓 같은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웃돈이 붙어 거래되고 있다.SNS에는 “드디어 하나 구했다”, “《오만과 편견》이 나올 때까지 빵 사냥은 계속된다”라는 인증 글이 줄을 잇고, 유튜브에는 재입고 시간과 재고 확인 요령을 정리한 구매 꿀팁 영상이 쏟아지고 있다.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민음사 빵의 열풍은 아무런 징후도 없이 돌연 발생한 싱크홀 같은 건 아니다. 열풍의 밑단에는 분명히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차곡차곡 겹쳐 있을 것이다.그럼, 먼저 데이터를 보면서 접근해 보자.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38.5%로, 2023년보다 4.5%포인트 하락하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20대의 종합독서율은 75.3%로, 전체 성인 평균의 약 두 배에 달했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인구는 전체적으로 줄고 있지만, 특정 세대에서는 오히려 책과 문학이 ‘힙한 것’으로 재조명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는 약 16만 명이 몰려 지난 해보다 1만 명 늘었고, 민음사가 서울 아이파크몰에서 진행한 팝업 행사에는 대기 접수만 400팀을 넘는 인파가 모였다는 보도가 있었다.올림 컬럼 ‘[Trend Insight_9]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의 모순적 트렌드, 텍스트힙(Text Hip)’ 편에서도 책을 읽지는 않지만, 책과 관련된 트렌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래서 우선 가장 먼저 민음사 빵의 열풍은 텍스트힙 트렌드라는 이미 자리 잡은 흐름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텍스트힙은 책과 글을 읽는 행위 자체를 세련되고 개성 있는 취향으로 여기는 문화로, 지난 한두 해 사이 2030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해 왔다. 민음사 빵은 이 텍스트힙 정서를 가장 접근하기 쉬운 형태, 즉 편의점에서 3,000원 안팎으로 살 수 있는 빵이라는 형태로 옮겨온 셈이다. 무거운 책 한 권을 완독할 자신은 없어도, 좋아하는 작품의 표지가 그려진 빵을 사 먹으며 ‘나도 문학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감각을 가볍게 누릴 수 있으니, 이것보다 더 쉽고 가볍게 텍스트힙을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은 아마 없을 것이다.하지만 단순히 텍스트힙의 연장선으로만 열풍을 설명하기에는 무척 아쉬운 측면이 있다. 분명 빵의 열풍에는 브랜드 전략이 소비자를 움직이게 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 심리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듬뿍 담겨있다.우선 민음사 빵의 열풍에는 ‘랜덤깡’의 요소, 즉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뽑기 심리가 작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빵 자체의 맛보다 그 안에 무작위로 들어 있는 책갈피가 흥행의 실질적인 동력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20여 종의 책갈피 중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은 사람들의 수집욕과 도전 의식을 자극했고,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반복 구매하게 만드는 강력한 유인이 되었다. 이는 마치 가챠뽑기나 카드 게임의 뽑기 메커니즘과 같은 구조로, 이미 다른 산업에서 검증된 소비 심리가 문학과 결합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둘째는 ‘희소성과 오프라인 탐색의 재미’라는 요소를 들 수 있다. 매장마다 하루 서너 개씩만 들어오는 한정된 물량은 자연스럽게 품귀 현상을 낳았고, 이는 오히려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더 자극했다. 여러 편의점을 돌아다니며 재고를 확인하고, 입고 시간에 맞춰 방문하고, 점장과 친분을 쌓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작은 모험이자 놀이가 된 셈이다. 알고리즘이 알아서 알려주는 디지털 콘텐츠와 달리, 직접 발품을 팔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성취감이 이 열풍을 더 뜨겁게 만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사실 ‘랜덤하게 나오는 희소성의 물품을 오프라인에서 손에 넣는’ 행위는 가챠뽑기방이 인기를 얻으며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배경과 같다. 가챠뽑기방은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려 무작위로 완구나 피규어 등이 들어있는 캡슐을 뽑는 '가챠(Gacha)' 기계들을 한곳에 모아놓은 무인 또는 유인 매장을 말한다. 일본의 캡슐 토이 문화에서 유래했으며, 한국에서는 ‘뽑기방’ 또는 ‘캡슐토이 매장’으로도 불린다. ‘가챠’라는 이름은 기계의 레버를 돌릴 때 나는 ‘철컥(가차)’ 소리를 일본에서 ‘가챠’라고 한 데에서 유래했다. 이 가챠뽑기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돈을 넣어도 원하는 제품을 확정해서 가질 수 없고, 확률에 따라 무작위로 상품을 얻게 되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단순한 어린이용 장난감에 그치지 않고 인기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독특한 미니어처 소품 등 성인 수집가(키덜트)를 겨냥한 고품질 피규어 제품이 많이 등장하면서 인기는 급속하게 확대됐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가챠뽑기방이 키오스크(동전 교환기)만 비치한 채 24시간 무인으로 운영할 수 있어서 출점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그러니 민음사 빵은 ‘랜덤하게 나오는 희소성의 물품을 오프라인에서 손에 넣는’ 기쁨을 추구하는 소비자 심리와 시대의 흐름을 잘 버무려 성공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지 않을까 한다. 바로 출판사들이 보여주는 ‘문화 브랜드’로의 전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열풍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곳은 편의점이 아니라 민음사의 행보라 할 수 있다.민음사에게 이번 빵 협업은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훨씬 큰 그림의 일부로 읽히는 측면이 있다. 민음사는 이미 유료 독서 커뮤니티인 ‘민음북클럽’을 운영하며 회원 수를 꾸준히 늘려왔고, 자체 유튜브 채널 ‘민음사TV’도 수십만 구독자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서울국제도서전 부스 운영, 캐릭터 협업 굿즈, 아이파크몰 팝업스토어까지 더해지면서, 민음사는 책을 파는 출판사에서 콘텐츠와 경험을 파는 문화 브랜드로 조금씩 자리를 옮기고 있다. 이번 빵 열풍은 그 전환 과정에서 나온 상징적인 사건에 가깝다고 본다. 책은 이제 서점 매대뿐 아니라 유튜브, 북클럽, 도서전, 그리고 편의점 냉장 진열대에도 함께 놓여 있는 셈이다.이런 흐름은 다른 출판사들에도 자극이 되고 있다.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사 등 이른바 4대 문학출판사로 불리는 곳들도 각자 시인선과 세계문학 시리즈를 통해 오랫동안 팬층을 쌓아왔는데, 민음사 빵의 흥행은 이들에게 굿즈와 이종 산업 협업이 더 이상 유행에 편승하는 곁가지 사업이 아니라 브랜드 인지도와 신규 독자 유입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유효한 전략임을 보여준 셈이다. 실제로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여러 출판사가 티셔츠, 에코백, 키링, 책갈피, 키캡 등 다양한 굿즈를 선보이며 이미 비슷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편의점 업계 역시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다. GS25뿐 아니라 CU, 세븐일레븐 등 주요 편의점들은 최근 몇 년간 베이커리 라인업을 강화하며 유명 브랜드나 화제성 있는 콘텐츠와의 협업을 늘려왔다. CU는 지역 명물 빵집과 손잡고, 세븐일레븐은 SNS에서 화제가 된 디저트를 발 빠르게 상품화하며 디저트 매출을 매년 두 자릿수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문학’이라는, 그동안 편의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영역과의 협업이 오히려 신선한 차별화 포인트로 통했고, 그 결과가 민음사 빵이라는 초대형 히트로 이어진 것이다. 경기 둔화와 점포 포화로 경쟁이 치열해진 편의점 업계 입장에서, 이종 산업과의 이색 협업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에 가까워지고 있다.그렇다면 열풍의 공급자인 민음사와 편의점의 전략은 과연 수요자인 소비자의 어떤 마음을 자극했던 것일까? 민음사 빵 현상을 소비자 심리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작은 사치(스몰 럭셔리)’이다. 고물가와 경기 둔화로 큰 지출을 망설이게 되는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3,000~4,000원짜리 빵처럼 부담 없는 가격으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소비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문학 작품’이라는 취향적 요소가 더해지면서, 이 작은 소비는 단순한 간식 구매를 넘어 자기 취향을 확인하고 표현하는 행위가 되었다.둘째는 앞서도 언급한 ‘컬렉팅 심리와 불확실성이 주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는 점은 소비자에게 약간의 스릴을 제공한다. 완결된 세트를 모으고 싶은 욕구, 즉 인간의 수집 본능은 이미 스티커, 피규어, 카드 게임 등 여러 산업에서 검증된 강력한 소비 동인이다. 여기에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한때 집집마다 책장에 꽂혀 있던 향수 어린 상징이 결합하면서, 단순한 뽑기를 넘어 “어릴 적 꿈이었던 세계문학전집을 모으고 있다!”라는 정서적 만족감까지 더해지면 열풍이 증폭되었다고 할 수 있다.셋째는 ‘오프라인 경험에 대한 갈증’이다. 온라인 쇼핑과 배달 앱이 일상이 된 시대에, 직접 발품을 팔아 여러 매장을 돌아다니고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는 경험은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진다. 클릭 몇 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환경일수록, 노력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커진다. 민음사 빵을 구하러 다니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놀이이자 소셜미디어에 공유할 만한 콘텐츠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넷째는 ‘정체성 소비’를 들 수 있다. 텍스트힙 흐름 안에서 책을 읽거나 문학 굿즈를 소비하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 ‘나는 이런 감성과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다. 민음사 빵을 구매하고 인증하는 행위 역시 실제로 책을 완독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문학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SNS상에서 표현하려는 욕구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민음사 빵이 열풍이라는 소식을 듣고 빵을 사보려고 몇 번이나 가까운 편의점을 방문해 시도를 해보았지만 실패였다. 하루는 우리동네GS에서 재고찾기를 해보니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재고 한 개가 있다고 뛰어갔는데, 편의점에 도착하기 1분 전에 ‘1’이라는 재고 표시가 ‘0’으로 바뀌는 바람에 허탈하게 돌아선 적도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트렌드에 민감하고, 수집에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는 좀더 땀과 눈물을 흘려야 영접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더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그런데 이 열풍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도 든다. ‘과연 이 열풍은 얼마나 갈까?’라는.민음사 빵 현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번 사례가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정말로 긴 글과 문학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서전에 십만 명 넘는 인파가 몰리고, 출판사 유튜브와 북클럽에 수만 명이 모이는 현상은, 활자 콘텐츠에 대한 갈증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 갈증이 이제는 서점이라는 전통적인 공간을 넘어, 편의점 진열대나 SNS 피드처럼 훨씬 일상적이고 가벼운 접점을 통해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번 사례는 ‘콘텐츠 자체의 힘만큼이나, 그 콘텐츠를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느냐’가 브랜드의 생존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을 출판업계에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책을 너무나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앞으로 또 어떤 출판사가, 어떤 예상 밖의 조합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계속 지켜볼 만한 흐름이지 않을까 한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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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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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Lounge_22] 외로움의 대처법, 건강하게 ‘퇴행 충전’

요즘 각 정부 부처나 지자체의 조사 관련 이슈를 접하다 보면, ‘외로움’, ‘고립’, ‘돌봄’ 등의 사회적 케어와 관련된 단어가 자주 눈에 들어온다. 사회적 케어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 프로젝트에 많이 참여하면서 나름 전문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절로 다른 사람이라면 스쳐 지나갈 단어라도 멈추어 들여다보게 된다.작년에 출간했던 『외로움의 함정』과 『외로움을 소비하는 사회(공저)』도 어찌 보면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추어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외로움을 담아내려 한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얼마 전인 8월 말에 출판사 담당자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출간하고 나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외로움의 함정』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도서 지원 사업인 ‘세종 도서’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출판 분야에는 문외한이다 보니 이게 얼마나 기뻐해야 할 상황인지 얼떨떨하던 참이었는데, 10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한 지인이 이 소식을 알려주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와우, 대단하네요. 난 1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는데 아직 선정된 적이 없는데.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충분히 자랑하고 기뻐할 일이에요.”그래서 오늘의 컬럼은 세종 도서 선정을 기념해서 외로움에 대해, 특히 외로움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한다. 퇴행과 관련해서 말이다.외롭다는 감정은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정서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기 쉬운 구체적인 감정과 동반해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슬픔을 느낄 때, 슬픔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두려울 때, 두려움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허무할 때 허무함과 함께 외로움을 느낀다. 내가 슬프거나 두렵거나 허무할 때, 내 곁에 나를 깊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함께 한다면 그런 감정들은 잠시 머물다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나눌 사람이 없는 고립 상태라면 더 슬프고 두렵고 허무하다고 느낄 것이다.외로움은 우울과 불안을 동반하는 경향이 있다. 외로운 사람은 다 우울하다든지, 우울한 사람은 다 외롭다든지 하는 상관관계가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외로움은 우울증의 분명한 위험 요소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회불안도 외로움과의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관련은 있다. 이처럼 외로움으로 인한 우울과 사회불안의 공통적인 증상 중 하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회사에 가기 싫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심리는 누구든지 겪어봤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왜 모두가 당연한 것처럼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 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 개미를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개미라는 것은 매우 기묘한 생물이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생물은 개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개나 고양이는 시간 대부분을 낮잠 자는 데에 보내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왜, 개나 고양이처럼 살 수 있는 생물과 개미나 사람처럼 살아가는 생물이 있을까? 인간의 행동도 개미와 마찬가지로 다른 생물종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아마 굉장히 기묘하고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버릇처럼 모두가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간이 부족한 것일까? 지구라도 다시 건설할 셈인가? 회사나 학교에 ‘가고 싶은데 안 되는’ 상태일 때, 그때 바로 느꼈던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도대체 누가 왜 인간이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정상이면 학교나 회사에 가는 것이라고 정했단 말인가? 하필이면 우리는 왜 그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일까? 하는 억울한 심정 말이다. 그 당시 심리 상태를 변명해 준 것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었다.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29쪽)가정, 학교, 직장 등, 각각의 ‘무대’를 밖에서 바라보는 감각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자신이 해내고 있는 일상의 루틴이 역겹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분명 사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인간은 그저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인간들은 용케도 그 부조리한 것들을 묵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카뮈는 우리에게 좀 더 생각하고, 더 나아가 의식적인 행동을 기대했을지 모르나, 결근이나 결석을 하고 나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대단한 철학적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고작해야 실컷 늦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고 억울함은 사라져 버린다. 의식적인 게으름은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열정을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은 잠시라도 쉬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쉬지 않고 성과에 매달리다 보면, 외부로부터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 멈출 수밖에 없는 때가 찾아온다.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거나 조직에서 밀려날 때 우리는 좌절하고 낙담한 나머지 자신의 모든 재능마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알고 보면, 우리의 능력은 세상의 평가보다 더 높은 곳에 있기도 하다. 자신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 쉬어 보면 답을 찾을 때가 있다. 외로움의 단계가 시작될 때,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무기력이 나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바깥 세계와 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내면 세계를 살펴주어야 한다. 무지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삶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아는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삶은 차이가 있다. 마음이 잘 길들여진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놓지 않는다. 지금처럼 바쁘게 사는 것이 정상처럼 되어 있는 시대에 나 혼자만 도태되는 느낌과 함께 무기력감이 밀려올 때는 의도적으로 나태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누구라도 큰 사건을 겪거나 매우 피곤하거나 어떤 특수한 환경에 놓이게 되면 지각, 사고, 감정, 행동을 지휘하는 마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지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의 존재 여부를 알려주고, 사고는 그 존재하는 것의 정체를 알려주며, 감정은 그 존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러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인지가 왜곡되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거나 생소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때 위기에 처한 자아를 구하기 위해 퇴행(regression)이라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등장한다.퇴행은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자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아이로 돌아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퇴행을 발견한 것은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이다. 프로이트는 사람은 누구라도 마음에 유아기의 과거가 남아 있어, 힘든 상황에 놓이면 퇴행이 출현하는 것을 발견했다. 퇴행은 병적인 퇴행과 자아를 위한 건강한 퇴행으로 나눈다. 퇴행하는 발달 단계에 따라 발현되는 정신 증상이 다르고, 흔히 구강기로 퇴행하면 우울증, 항문기로 퇴행하면 강박신경증, 남근기로 퇴행하면 히스테리라는 정신 증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노래방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 이것은 구강기로의 건강한 퇴행이다. 무의식 속에서는 젖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모형을 수집하며 즐기는 것. 이것은 항문기로의 건강한 퇴행이다. 퇴행은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정신 현상이며, 일상생활 속에서 퇴행을 무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퇴행의 대표적인 상태는 수면이며, 누구나 하루에 한 번은 가장 원시적인 상태인 수면으로 돌아가 피로를 푼다.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성장 과정에는 즐거운 시기도 있고 힘든 시기도 있다. 퇴행을 하여 괴로움의 원점을 확인하듯, 그 고통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까지 돌아갈 때와, 이와 반대로 즐거웠던 시기까지 돌아갈 때가 있다. 즐거웠던 시기, 편안했던 시기로 돌아갔을 때는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출발하기가 쉽다. 그러나 고통의 시기로 돌아가 정신 상태가 고착되면 재출발이 어렵다. 인간은 나선형을 그리며 성장한다. 일시적인 퇴행은 다음 성장을 위한 삐걱거림이다. 서두르지 말고 힘을 비축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다만, 적절한 시기에 다시 성장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 성장을 위한 충전을 위해서는 일시적인 퇴행이 필요하고, 일부러라도 ‘퇴행 의식’을 치루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한 필자의 일화를 소개해 본다.딸아이가 고3이었을 때, 수시로 시행되는 모의고사나 각종 시험이 있는 날이면, 시험 날을 전후로 유난스럽게 어리광을 부렸다. 갑자기 갓난아이가 된 것처럼 안기기도 하고, 내 옆에 누워 엄마와 함께 자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공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고3이니 나름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고3 내내 그런 증세가 보이면, 나는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고3 시절에 유난히 몸집이 커진 딸아이를 어린애처럼 안고, 퇴행 의식인 ‘퇴행 충전’ 시간을 갖곤 했다. ‘퇴행 충전’ 시간의 커뮤니케이션 랭귀지는 ‘옹알이’로 정했다. 딸아이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 아기로 퇴행했다.  *AI생성 이미지내가 해주는 말들은 주로 갓난아기였을 때의 귀여웠던 모습들이나, 학교가 그렇게 가기 싫으면 엄마가 대신 교복을 입고 이름표를 달고 학교에 가겠다느니, 적성에 안 맞는 공부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겠냐며 위로하기도 하고, 우리 딸 얼굴도 이쁜데 공부까지 잘하면 큰일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며 20분에서 30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면 다리도 저려 오고, 딸아이도 안겨 있는 자세가 갑갑한지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로봇청소기에서 나오는 음성과 똑같이 “충전이 끝났습니다!”를 외치며 딸아이를 밀쳐내고 서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딸아이는 지금 서른 살이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의 ‘퇴행 충전’을 요구한다. 현대의 직장인들은 하루 종일 회사 일로 시달리다 집에 오면 뒹굴뒹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텔레비전만 본다. 이것도 퇴행해서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퇴행은 에너지를 보급해 주어 활력을 되찾아준다. 이때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즉 마음 편하게 퇴행할 수 있는 사람과 장소, 시간이다. 이 3가지를 다 갖추고 퇴행 의식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 가지라도 있으면 도움이 된다. 긴장에서 벗어나 릴렉스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지, 집이 아니라면 카페나 도서관, 공원, 자동차 안이라도 좋다. 일상으로 바쁜 우리들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퇴행 충전은 혼자서 멍하니 있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공간에서 정말 아무 생각없이, 또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서 잠시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인간에게 퇴행이란 복잡한 생각을 가지기 전,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었던,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느끼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금 무책임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카페에 혼자 편안히 앉아 있다면 오롯이 커피의 향을 즐기고, 어둑해지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오가는 사람의 발 끝을 바라보면 세상의 분산함과 거리를 두어보고, 카페에 흐르는 뭔가 모를 느리고 차분한 공기를 폐에 담아보는 것도 멋진 퇴행 충전이 될 수 있다.  *AI생성 이미지이렇듯 우리에게는 잠깐이라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단 몇십 분 만이라도 잠시 일상에서 떠나 산책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루틴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편하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꼭 친밀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나눌 대화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즐겁고 유쾌한 퇴행 충전도 가능할 것이다.퇴행할 수 있는 장소, 시간, 사람이 동시에 있으면 가장 효과적이지만, 이 중 한 가지라도 평소에 만들어 놓고 자신이 지금 퇴행 의식을 통해 충전이 필요한 상태라고 인식하고 퇴행할 수 있다면 무기력으로 인한 외로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인생에서는 생산을 위해서 충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제대로 충전이 되어야 생산도 가능하다고 가치관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사람은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성장하는 과정은 물론 성장한 후에도 의지할 곳이 필요하다. 특별히 원대한 꿈을 꾸며 강한 의지를 품고 대단한 노력을 하려고 해도 한순간에 무참히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과 역경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고난과 역경은 하늘의 몫이고, 단지 그런 시련이 닥쳤을 때 어떻게 겪어내느냐만이 사람의 몫이다. 이때 묵묵히 자신을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 시간들을 살아낼 수 있다. 자신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평상시에 의식적으로 판단하여, 이에 대한 나만의 충전 방식을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 보자._ 이완정_『외로움의 함정』 저자/(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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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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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22] ‘적당히’는 이제 없다, 맥싱(Maxxing)의 시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비우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옷장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처분하고, “적게 소유할수록 더 자유롭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시절. 그런데 요즘 SNS를 열어보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수면 안대와 마우스 테이프를 하고 자는 사람, 단백질 함량을 0.1g 단위로 따지는 사람, 향수를 레이어링해서 자신만의 시그니처 향을 완성하는 사람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들이 입을 모아 쓰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맥싱(Maxxing)’이다. 맥싱은 잠도, 단백질도, 인간관계도 ‘Full충전’하는 트렌드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비움의 미학이 지배하던 자리에, 이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는 태도로 지금의 흐름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사는 것이 최고라며 우리 곁에 트렌드로 자리잡았던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와 맥싱은 도대체 어떻게 다른 걸까? 그리고 도대체 맥싱 트렌드는 어떤 사회적 요인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일까?맥싱은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치나 아이템을 최대치(max)로 끌어올린다는 표현에서 출발한 말이다. 여기에 ‘~하는 행위’를 뜻하는 접미사 ‘-ing’이 붙으면서, 삶의 특정 영역을 극단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최적화하는 태도 전반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미국의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는 지난해 말 이 ‘-맥싱’이라는 접미사를 새 단어로 등재하면서 “삶의 특정 영역을, 종종 극단적일 정도로 최적화하는 행위”라고 풀이했다.시작은 2010년대 중반, 외모를 극단적으로 가꾸는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의 ‘룩스맥싱(Looksmaxxing)’이었다. 피부 관리와 운동 같은 일상적인 방법부터 시술까지 동원해 외모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자는 흐름이었다. 그런데 2020년대 들어 이 접미사가 소셜미디어를 타고 폭발적으로 퍼지면서, 이제는 외모를 넘어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붙는 만능 접두어가 되었다. 잠을 최적화하는 ‘슬립맥싱(Sleepmaxxing)’, 단백질 섭취를 극대화하는 ‘프로틴맥싱(Proteinmaxxing)’, 건강 전반을 관리하는 ‘헬스맥싱(Healthmaxxing)’, 자신만의 향을 완성하는 ‘스멜맥싱(Smellmaxxing)’, 성격까지 다듬으려는 ‘퍼스낼리티맥싱(Personalitymaxxing)’, 심지어 도시에서의 삶을 최대치로 누리자는 ‘런던맥싱(Londonmaxxing)’까지 등장했다.흥미로운 점은 이 흐름이 이전 트렌드였던 ‘갓생(계획적이고 모범적인 하루를 사는 삶의 태도)’과도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갓생이 하루를 부지런히 채우는 총량의 태도였다면, 맥싱은 삶을 잘게 쪼갠 뒤 각각의 요소를 개별적으로, 그것도 최대치까지 파고드는 태도에 가깝다.“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가 아니라 “나는 수면의 질을 몇 점까지 끌어올렸다”라거나 “내 단백질 섭취량은 목표치를 넘겼다”처럼, 관리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수치화되고 최적화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최근에는 이런 극단적 최적화 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옷을 입는 즐거움 자체를 극대화하자는 ‘윔지맥싱(Whimsymaxxing)’ 같은 흐름도 패션계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고 한다.자기 관리에 지친 이들이 이제는 기쁨과 장난스러움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인데, 이 역시 결국 ‘맥싱’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변주라는 점이 재미있다.그런데 미니멀리즘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여, 일 또는 물질 소유를 최소화, 단순화하는 삶의 양식을 말하는 미니멀 라이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미니’의 반대 개념인 ‘맥스’가 트렌드로 등장하니 약간 어리둥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두 트렌드 모두 ‘더 나은 삶’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지만, 그 방향과 태도는 정반대에 가깝다. 그 차이를 표로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이 되지 않을까 한다. 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방향은 정반대지만, 두 트렌드가 사람들에게 주는 심리적 보상은 결국 ‘통제감’으로 같다는 사실이다. 미니멀 라이프가 불확실한 삶 속에서 무언가를 덜어냄으로써 안정을 찾으려 했다면, 맥싱은 반대로 무언가를 채우고 수치화함으로써 같은 안정을 찾으려 한다. 결국 두 흐름 모두, 내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쥐고 싶다는 같은 욕망의 서로 다른 얼굴인 셈이다.지금의 맥싱 트렌드가 젊은 세대나 SNS 중심의 단발적인 화제가 아니라 시대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이어지는 모습은 몇 가지 조사 데이터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소셜 리스닝 기업 ‘멜트워터’가 X, 틱톡, 핀터레스트, 레딧 등 20여 개 플랫폼을 대상으로 올해 1월부터 5월 말까지의 언급량을 분석한 결과, ‘맥싱’ 관련 언급이 같은 기간 동안 96% 증가했고, 관련 게시물의 참여도(engagement)는 208%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가장 참여도가 높았던 게시물 표본을 살펴보면 약 36%가 룩스맥싱을 비롯한 외모 관련 콘텐츠였지만, 이제는 생일 파티 준비 과정을 극대화한 ‘버스데이맥싱’처럼 일상의 소소한 순간까지 이 단어가 붙을 만큼 쓰임이 넓어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구글 역시 올해 여름 미국 검색 데이터를 분석한 트렌드 리포트에서 이 계절을 아예 ‘맥싱의 여름(Summer of Maxxing)’이라 이름 붙였다. 그중에서도 수면을 다루는 ‘슬립맥싱’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는데, 틱톡에서는 관련 콘텐츠의 누적 조회수가 2억 회를 넘어섰고, 글로벌 웰니스 조사기관인 GWI(Global Wellness Institute)도 슬립맥싱을 올해의 주요 웰니스 트렌드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이다.국내에서도 흐름은 비슷하다.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 ‘29CM’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 사이 수면 관련 용품의 거래액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최대 3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수면 안대, 귀마개, 수면 유도 영양제, 수면의 질을 측정하는 스마트워치까지, 잘 자기 위한 소비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여기에 더해, 사전에 새로운 단어로 등재될 만큼 언어 자체가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흐름이 일시적인 밈을 넘어섰다는 신호로 읽힌다. 신조어가 사전에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이 단어가 특정 세대나 커뮤니티를 넘어 대중적인 언어생활 속으로 들어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이런 맥싱 트렌드를 마케팅 담당자들이 그냥 둘 리가 없을 것이다.미국의 건강식 브랜드 퍼렐리 엘리자베스(Purely Elizabeth)는 최근 신제품 ‘프로틴 앤션트 그레인 그래놀라’를 내놓으며, 요즘 유행하는 ‘프로틴맥싱’ 현상 자체를 살짝 비틀어 풍자하는 캠페인을 선보였다. 단백질에 집착하다시피 매달리는 요즘 소비 트렌드를 유쾌하게 짚어내면서도 정작 자사 제품은 그 트렌드에 정확히 올라타는 영리한 전략을 택한 것인데, 이 제품은 출시 첫 달 만에 카테고리 판매 기준치를 훌쩍 뛰어넘었고, 회사는 미국 그래놀라 시장에서 매출·판매량 기준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시 마케팅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 영국에서는 런던에서의 삶을 최대치로 누리자는 ‘런던맥싱’이라는 표현이 언론과 지역 경제 담론에까지 등장하며, 침체된 도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낙관적 서사로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앞서 언급한 29CM처럼 유통 플랫폼들이 수면·건강 카테고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이 흐름에 대응하고 있다. 헬스&뷰티 스토어들 역시 단순 화장품 유통을 넘어 건강기능식품과 수면 보조 용품 코너를 빠르게 확장하며, 소비자의 관리 대상이 늘어난 만큼 매대를 세분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패션 업계에서는 오히려 정반대 방향의 흐름도 감지된다. 자기 관리에 지친 소비자들을 겨냥해 ‘즐거움 자체를 극대화하자’라는 윔지맥싱적 무드를 내세운 컬렉션과 캠페인이 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맥싱 트렌드가 단일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소비자의 피로감까지 감지하며 스스로 변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이처럼 브랜드 입장에서 맥싱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하나는 소비자의 최적화 욕구에 실질적인 도구(보충제, 수면용품, 트래킹 기기)를 제공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욕구 자체를 유쾌하게 관찰하고 살짝 비트는 방식이다. 전자가 ‘기능’으로 다가간다면, 후자는 ‘공감’으로 다가간다는 차이가 있다.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지금, 비움이 아니라 채움을 택하게 됐을까. 몇 가지 사회심리학적 배경을 짚어볼 수 있다.첫째로, 불확실성 속 통제감에 대한 갈망을 들 수 있다. 고용 불안, 자산 격차,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찾는다. 거시적인 삶의 방향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오늘 밤 몇 시간을 어떻게 잤는지, 오늘 단백질을 몇 그램 섭취했는지는 스스로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통제 소재(locus of control)’를 외부에서 내부로, 아주 작은 단위까지 끌어당기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둘째, 수치화된 자아, 이른바 ‘퀀티파이드 셀프(Quantified Self)’ 문화의 확산을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스마트워치와 각종 헬스 앱이 수면 점수, 심박 변이도, 걸음 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데이터로 인식하는 데 점점 익숙해졌다. 데이터로 보이는 것은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이 믿음이 곧 맥싱의 동력이 된 셈이다. 무언가를 측정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최대화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셋째,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비교가 가능해졌다는 사실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과거의 사회적 비교가 이웃이나 동료라는 한정된 대상과의 비교였다면,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콘텐츠가 알고리즘을 통해 매일 눈앞에 도달한다. ‘적당히 잘 지내는 삶’은 더 이상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고, ‘최대치로 관리된 삶’이 새로운 기준선이 되었다. 이 기준선에 맞추려는 압박이 자연스럽게 맥싱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넷째, 완벽주의의 대중화도 배경 요인이다. 심리학에서는 완벽주의를 스스로에게 가혹한 기준을 적용하는 ‘자기지향적 완벽주의’와, 타인이나 사회가 부과한 기준에 맞추려는 ‘사회적으로 부과된 완벽주의’로 나눈다. 맥싱 트렌드는 이 두 가지가 뒤섞여 나타나는 대중적 현상에 가깝다. 소셜미디어 속 ‘완벽하게 관리된 루틴’이라는 사회적 기준이 개인의 자기지향적 기준과 결합하면서, 삶의 사소한 영역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역설적으로 앞서 언급했던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피로감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적게 소유하라”, “불필요한 것을 버려라”라는 메시지 역시 오랜 시간 지속되면 또 하나의 규범이자 압박으로 다가온다. 비움을 강요받는 데 지친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로 “원하는 만큼 채워도 괜찮다”라는 메시지에 해방감을 느끼며 옮겨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결국 맥싱은 자기계발 열풍, 웰니스 산업의 성장, 소셜미디어의 비교 문화, 그리고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통제 욕구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어떤 영역이든 극단적인 최적화 추구는 번아웃이나 강박으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실제로 룩스맥싱 같은 일부 파생어는 청소년 정신건강에 대한 우려와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비움에서 채움으로, 미니멀에서 맥싱으로. 트렌드의 진자는 다시 한번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두 흐름을 관통하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내 삶의 한 조각만이라도 스스로 완성해 보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비움이든 채움이든 결국 같은 자리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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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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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Lounge_21] 리서치업계의 허리가 끊어지고 있다?!

이전에 함께 리서치업계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이런 얘기가 나온다. “예전에 같이 입찰에 참여했던 회사들이 요즘 잘 보이지가 않아요.”“그 많던 중견 리서치회사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저 몇몇 사람들의 체감이나 소문 정도로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 이야기가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서 그리고 여러 자리에서 반복해서 들리기 시작하니 어느 순간부터 “혹시 이게 정말 업계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흐름은 아닐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사실 이런 식으로 한 업계의 ‘허리가 얇아지는’ 이야기는 리서치업계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건설업계에서도 대형사는 수도권 재건축이나 해외 대형 프로젝트를 독식하며 호실적을 자랑하는 반면, 중소·전문 건설사들은 수주 절벽과 자금난에 시달리며 폐업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제조업 전반에서도 반도체·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대기업 생산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데, 중소기업 생산은 오히려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통계로 확인되기도 한다.자본시장은 또 어떤가. 몇몇 거대 종목으로 투자금이 쏠리면서, 정작 자금이 필요한 중소·벤처기업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우려가 거의 매일 같이 신문 지면이나 TV 뉴스에 등장한다. 이런 흐름을 보면, ‘중견 리서치회사의 감소’라는 이야기 역시 리서치업계만의 특수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여러 산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좀 더 큰 흐름의 한 단면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업계도 그렇다니까, 우리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일은 아닐 듯싶다.일본의 상황은 어떤가 하고 검색을 해보니, 일본 리서치업계도 많은 중소 리서치회사가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실제로 업계에서 사라지는 숫자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 우리나라에서도 중견 리서치회사가 감소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과연 어떤 이유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먼저 느낌이나 인상만으로 판단하면 곤란하니, 피부로 체감할 수 있도록 숫자로 확인해 보기 위해 실제 매출 데이터부터 살펴보자. 국내 업계를 매년 추적해서 회사별 순위를 발표하는 자료들을 보면, 지난 몇 년간의 흐름이 꽤 뚜렷하게 드러난다.B&K 마켓 인텔리전스가 매년 발표하는 국내 리서치회사 순위의 2025년 데이터를 기준으로 보면, 상위권 회사들의 사정은 나쁘지 않다. 한국리서치는 매출이 700억 원대를 넘어서며 전년보다 8% 성장했고, 오랜 기간 업계 1위 자리를 지켜온 칸타코리아 역시 700억 원대 초반의 매출을 유지하고, 입소스코리아와 마크로밀엠브레인도 500억 원대 매출로 안정적인 상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여론조사·공공조사 쪽에서는 정치 이벤트의 특수를 누린 케이스탯리서치(+21%), 넥스트리서치(+19%), 글로벌리서치(+15%) 같은 회사들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문제는 중위권이다. 같은 순위표 안에서 나란히 놓고 보면, 매출이 두 자릿수 비율로 줄어든 회사들이 유독 이 구간에 몰려 있다. 한 해 사이 매출이 30% 가까이 빠진 곳도 있고, 25%, 27% 감소한 곳들도 눈에 뛴다. 상위 10위권 안의 대형사들이나, 반대로 하위권의 특화된 소형사들과 비교했을 때, 정확히 중간층에 해당하는 회사들에서 감소 폭이 유독 크게 눈에 들어온다. 물론 매년 순위가 바뀌고 특정 프로젝트 하나에 매출이 크게 좌우되는 업계 특성상 일회성 등락일 수도 있지만, 이런 흐름이 한 해가 아니라 몇 년째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눈여겨볼 대목이다.시장 전체 규모로 봐도 비슷한 그림이 나온다. 한국조사협회(KORA)에 소속된 회원사는 대략 50여 개로, 국내 리서치 시장 전체 규모는 8천억 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이 시장 규모의 상당 부분을 상위 몇 개 회사가 차지하고, 나머지 다수의 중소·중견 회사들이 남은 파이를 나눠 갖는 구조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이른바 ‘허리가 얇아지는’ 현상, 즉 대형사와 소형·특화사는 각자의 자리를 지키거나 오히려 성장하는데, 그 중간에 있는 회사들만 유독 압박을 받는 모습이 데이터로도 확인되는 셈이다.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규모와 포지셔닝에 따라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인력 구조를 봐도 비슷한 신호가 읽힌다. 대형사들은 매출과 함께 인당 매출 지표(직원 1인당 벌어들이는 매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편인데, 이는 규모의 경제와 브랜드 프리미엄 덕분에 가격 협상력을 어느 정도 지켜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매출이 급감한 중견 리서치회사 중 상당수는 인당 매출이 1억 원 안팎, 혹은 그보다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매출은 줄어드는데 고정비 성격이 강한 인건비는 쉽게 줄이기 어려우니, 수익성은 매출 감소폭보다 더 크게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이 한두 해가 아니라 몇 년째 누적되면, 결국 사업을 접거나 대형사에 인수되거나, 혹은 조직 규모를 대폭 줄여 사실상 중견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이탈하는 회사들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볼 수 있다.그러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견 리서치회사의 감소’는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실제 매출 데이터와 업계 구조 변화로 뒷받침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정확히는 “회사 숫자 자체가 하루아침에 급격히 줄어들었다기보다는, 중간 규모 회사들의 매출과 입지가 상대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위축되고 있다”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눈에 띄게 폐업 소식이 쏟아지는 형태라기보다는, 조용히 규모가 쪼그라들거나 인수합병으로 간판이 바뀌거나, 신규 창업 대신 기존 회사에 흡수되는 식으로 서서히 중견이라는 층이 얇아지고 있는 모습에 가깝다고나 할까. 자 그렇다면 이제 진짜 궁금한 부분, 왜 하필 중간층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개인적인 견해를 포함해서) 살펴볼 차례다.사실 리서치업계는 오랫동안 나름의 안정적인 먹이사슬을 갖고 있었다. 최상위에는 글로벌 브랜드와 방대한 데이터 자산을 가진 소수의 대형사가 있고, 그 아래에는 특정 산업이나 방법론에 강점을 지닌 중견 리서치회사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소규모 필드워크 업체나 프리랜서 리서처들이 있는 식이었다.클라이언트 입장에서도 “이 정도 예산과 이 정도 신뢰도가 필요하면 이 회사, 좀 더 가볍게 가려면 저 회사”라는 식으로 규모별 역할 분담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이 먹이사슬의 중간 고리가 위아래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으며 흔들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압박은 구체적으로 어디서 오고 있는 걸까?우선 가장 큰 압박은 더 크게 몸집을 키우고 있는 대형사들의 위로부터의 압박이다. 글로벌 리서치기업들은 최근 몇 년간 활발하게 인수합병을 하며 몸집을 키우고, 동시에 비핵심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며 조직을 슬림화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자체 데이터 자산을 통합하고, 구독형 소비자 인텔리전스 서비스로 사업 모델 자체를 전환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실제로 한 글로벌 리서치기업은 최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대규모 자금을 조달했고, 이를 기술 투자와 부채 축소에 쓰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자본력은 결국 AI 기반 분석 도구 개발, 글로벌 패널 네트워크 확장, SaaS형 플랫폼 구축 등에 재투자되면서 대형사와 나머지 회사들 사이의 기술 격차를 더 벌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국내 회사들 역시 상위권에서는 꾸준히 매출을 늘리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오랫동안 외국계 기업들이 강세를 보이던 국내 리서치 시장에서, 토종 기업이 처음으로 매출 기준 1위에 오른 것도 최근의 일이다. 이런 대형사들은 브랜드 신뢰도, 오랜 업력에서 나오는 방법론적 노하우, 그리고 무엇보다 대형 클라이언트와의 장기 계약 관계를 무기로 삼곤 한다. 클라이언트가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곳’을 찾을 때, 결국 손이 가는 곳은 검증된 소수의 대형사인 경우가 많다.두 번째 압력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가해지고 있는데, 소형이거나 특정 영역에 특화된 회사들이 저렴하고 빠른 대안들을 쏟아내면서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예 조사업계 출신이 아닌 신규 플레이어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게 더해지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원래 리서치와는 무관해 보였던 기업들이 자체 패널과 설문 플랫폼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대형 인터넷은행이 자사 앱 이용자를 대상으로 설문 서비스를 출시해 순식간에 대규모 패널을 확보하기도 했고, 유통 계열 멤버십 회사가 자체 포인트 회원 데이터와 연동한 서베이 플랫폼을 선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미디어렙 회사가 통신사의 방대한 식별 패널을 활용한 조사·광고 결합 서비스를 내놓은 사례도 있다.이런 신규 플레이어들의 공통점은, 이미 확보하고 있던 방대한 이용자 기반을 그대로 조사 패널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리서치회사가 패널을 모집하고 관리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이들은 이미 갖고 있는 인프라로 대체한다. 그러니 자연히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고, 기존 리서치·패널 업체들 사이의 가격 및 속도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여기에 더해서 예전 같으면 전문 리서치회사에 의뢰해야 했던 간단한 설문조사를, 이제는 ‘DIY(Do It Yourself) 조사 툴’를 활용해서 마케터나 기획자가 직접 셀프서브 플랫폼을 통해 몇 시간 만에 설계하고 결과까지 받아볼 수 있게 됐다. 실제로 국내 한 리서치회사는 최근 문항 수가 적은 소비자 패널 조사의 경우, 패널에게 지급하는 응답 보상 비용 정도만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셀프서브형 서비스를 내놓았다. AI가 설문 설계부터 데이터 수집, 분석까지 전 과정을 사용자와 함께 수행하는 방식인데, 이런 서비스들이 자리를 잡을수록 가볍고 빠른 조사 수요는 굳이 중견 리서치회사를 거치지 않고도 해결되는 경우가 늘어난다.업계 위아래 쪽의 압박과 더불어 세 번째의 압박은 바로 AI와 합성 패널, 비용 구조 자체를 바꾸는 변수의 압박이다. 이 변화가 어쩌면 최근 1~2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라고 생각되는데,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이전 컬럼(리서치라운지 12)에서도 다루었던 ‘합성소비자(Synthetic Consumer)’와 ‘합성 패널(Synthetic Panel)’의 등장일 것이다. 실제 응답자를 모집하는 대신, 인구통계 데이터와 행동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가상의 응답을 생성해 내는 방식인데, 이미 글로벌 리서치 업계에서는 이를 상용화한 서비스가 나왔고, 국내에서도 관련 스타트업이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아직 초기 단계이고 정확도나 신뢰성에 대한 검증이 더 필요한 상황이지만, 응답자 모집이 어려운 시장이나 아이디어 검증 단계에서는 조사 속도를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이런 기술은 결국 조사에 반드시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을 모으고 관리하는 데 상당한 비용과 노하우가 드는 전통적인 리서치 산업의 전제 자체를 흔드는 변화라 할 수 있다. 이 흐름에 올라타 자체 AI 플랫폼을 개발하고 해외 시장까지 진출하는 국내 리서치회사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에 머물러 있는 회사도 많다. 문제는 이런 기술 투자가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형사는 자본력으로, 일부 기민한 스타트업은 처음부터 기술 중심으로 설계된 조직 구조로 이 변화에 대응할 수 있지만, 전통적인 방식의 인력과 프로세스를 오래 유지해 온 중견 규모 회사들은 이 투자 부담을 감당하기가 상대적으로 버거운 위치에 있다.네 번째 압박은 조사를 의뢰하는 클라이언트의 변화에서 발생했다. 최근 여러 기업이 제품·서비스 개발 속도를 높이고 자체 분석 역량을 갖추기 위해, 회사 내부에 UX 리서치 전담 조직을 신설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예전에는 사용자 조사나 제품 테스트를 외부 리서치회사에 통째로 맡겼다면, 이제는 설계와 분석의 상당 부분을 내부 인력이 직접 수행하고, 필요한 부분만 외부 솔루션이나 전문가에게 부분적으로 의뢰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이런 흐름 속에서 시장의 공급 방식도 다변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리서치회사의 UX 조직뿐 아니라, UX 컨설팅에 특화된 회사, 특정 솔루션에 집중한 테크기업, 패널과 서비스를 결합한 신생 플랫폼 등이 각자의 영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결국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내부적으로 하고”, “이 부분은 최고 수준의 대형사에 맡기고”, “이 간단한 설문은 저렴한 셀프서브 툴로 해결하자”라는 식으로 조사 예산을 잘게 나누어 배분하게 되면서, 이전처럼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는 통째로 중견 리서치회사에”라는 수요 자체가 줄어든 것이다.마지막으로 특정 분야 의존도가 높은 회사들의 변동성도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중견 조사회사 중 상당수는 여론조사나 특정 산업 분야에 매출을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런 회사들은 선거나 정치 이벤트가 있는 해에는 매출이 크게 뛰지만, 이벤트가 없는 해에는 급격히 줄어드는 ‘피크-밸리’ 패턴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최근 자료를 보면 대통령 탄핵이나 보궐선거 같은 정치 이벤트가 있었던 해에 관련 전문 회사들의 매출이 크게 늘었다가, 이후에는 다시 안정적인 공공 프로젝트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크게 엇갈리는 모습이다. 이런 구조적 변동성은 회사의 몸집이 작을수록, 그리고 특정 클라이언트나 특정 분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더 크게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는 곧 중견사들의 실적 등락 폭을 키우는 요인이 된다.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중견 리서치회사들이 처한 상황은 아마도 다음처럼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위로는 자본과 데이터 자산을 앞세운 대형사들이 시장의 신뢰와 대형 프로젝트를 흡수하고, 아래로는 저비용·고속의 셀프서브 도구와 이업종 플레이어들이 가볍고 반복적인 수요를 가져가며, 동시에 클라이언트 기업들은 조사 역량을 내부화하며 외주 자체를 줄이고 있다. 이 세 가지 압력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예전에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중간 규모의 종합 서비스형 조사회사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흔히 여러 산업에서 관찰되는 ‘허리가 사라지는 현상’, 혹은 양극화 구조가 리서치 업계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물론 이런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성장하는 중견 회사들이 있다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순위표에서도 특정 산업에 특화하거나, 정치·공공 이벤트를 계기로 입지를 넓히거나, 독자적인 방법론이나 데이터 자산을 갖춘 회사들은 오히려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한다. 결국 살아남는 중견 조사회사들의 공통점은 ‘모든 걸 다 하는 종합 리서치회사’에서 벗어나, 특정 산업이나 방법론에서 확실한 전문성을 쌓거나, 기술 투자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거나, 대형사와 소형사 사이에서 자신만의 틈새를 찾은 회사들이라는 점이다. 애매하게 모든 영역을 두루 다루면서 규모의 이점도, 민첩함의 이점도 갖지 못한 회사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고 있는 셈이다.중견 리서치회사가 줄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체감이나 소문이 아니라 실제 매출 데이터와 업계 구조 변화로 확인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걸 단순히 ‘중견 리서치회사의 위기’라고만 부르기보다는, 리서치 산업 전체가 재편되는 과정 중 하나로 보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이런 변화 앞에서 중견 규모 조사회사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결국 ‘우리만 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규모로는 대형사를, 속도와 가격으로는 신생 셀프서브 플랫폼을 이길 수 없다면, 결국 특정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 오랜 시간 쌓아온 방법론적 신뢰, 혹은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효율을 높이는 것 중 하나에서라도 확실한 차별점을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_ 이완정_『외로움의 함정』 저자/(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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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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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21] 엄마 없인 못 살아, ‘엄미새’가 뭐길래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만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아마도 질문을 받게 된다면 아마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같은 대답을 하리라 생각한다.그 대답은, 바로 “엄마!”.엄마는 인간의 탄생과 생존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잉태되어 자라나다가 세상 빛을 보게 되고, 엄마의 젖을 먹고 엄마 품에서 잠들고 엄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다. 물론 아빠나 다른 주변인이 엄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대체자는 되기 어렵다. 그래서 상담심리학에서도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가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케이스를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가 “엄마 없인 못 살아!”라고 말한다고 해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2026년 지금, 이런 마음을 담은 표현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트렌드가 되었다. 바로 ‘엄미새’.“엄마에 미친 자녀”의 줄임말로(‘미운 우리 새끼’라는 TV프로그램을 ‘미우새’로 줄여 부르는 것과 같다), 남자에 미친 사람을 뜻하는 ‘남미새’, 여자에 미친 사람을 뜻하는 ‘여미새’에서 파생된 신조어이다.언뜻 들으면 다소 과격하게 느껴지는 표현이지만, 실제 의미는 정반대에 가깝다. 엄마와 유독 친하고, 일상 대부분을 함께 나누며, 그 시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애정을 담아 부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엄미새 트렌드가 주목받을 이유가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엄마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이니 당연히 자식과는 세상 어떤 존재보다도 강한 연결고리를 지녔기 때문이다.하지만 인간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로 자리하는 시간은 영원하지는 않다. 대략 성인이 되어 독립하는 시기가 되면, 인간은 엄마(또는 부모)로부터 정서적, 경제적, 관계적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개체로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고 이전의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였던 엄마도 다른 존재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물론 이후로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유지되지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이라는 의미에서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는 의미이다.최근 엄미새 트렌드가 화제가 되는 것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나 지난 세대에서 여전히 엄마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성인이 되어 이전이라면 사회적 독립을 향해 나아가야 할 자녀들이, 연애보다 엄마와의 여행이 더 설레고, 친구와의 쇼핑보다 엄마와의 쇼핑이 더 편하다고 고백한다. 엄마와 커플룩을 맞춰 입고 팝업스토어를 찾거나, 단둘이 해외여행을 다녀온 기록을 SNS에 남기기도 하고, 이런 콘텐츠에는 “나도 엄미새인데 반갑다”라는 공감 댓글이 줄줄이 달린다. 걸그룹 아일릿의 원희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스스로 본인을 “완전 엄미새”라고 소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언니에 미친 ‘언미새’, 동생에 미친 ‘동미새’ 같은 변주까지 등장하면서 독립하기 이전의 원가족(Origin Family; 심리학에서 개인이 태어나서 성장한 가족, 즉 부모와 형제자매)과의 과도할 정도의 친밀성을 과시하는 것이 하나의 관계 트렌드로 자리 잡는 분위기이다.*AI생성 이미지흥미로운 건 세대 간 온도차이다. 과거에는 부모에게 유독 가까운 자녀를 ‘마마보이’, ‘마마걸’이라 부르며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고, 독립하지 못한 미성숙함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엄미새는 다르다. 자녀가 부모와의 친밀함을 숨기기는커녕 스스로 드러내고 자랑한다는 점에서,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관계와는 결이 다른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그럼, 지금 왜 엄마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엄미새라는 트렌드가 등장했을까?이 트렌드가 단순한 유행어 하나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 이면에 청년 세대가 처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첫째, 자녀의 독립이 늦어지고 있다. 국무조정실의 ‘2024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19~34세 청년의 절반 이상인 54.4%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9~24세의 부모 동거 비율은 78.1%에 달했고,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 중 구체적인 독립 계획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38.0%에 그쳤다. OECD 통계를 보면 한국 20대의 부모 동거 비율은 약 81%로, OECD 평균인 약 50%를 훌쩍 웃돈다. 높은 집값과 전셋값, 취업난이 독립 시기를 자꾸만 뒤로 미루고 있는 셈이다.둘째, 관계 맺기 자체가 피곤한 시대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쌓는 과정은 즐거움도 주지만, 적잖은 시간과 감정 소모를 동반한다. 상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할지,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도 크다. 반면 가족이 주는 무조건적인 지지와 편안함은, 사회생활에 지친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된다. 실제로 ‘결혼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2012년 56.5%에서 2022년 36.4%로 크게 줄었는데, 이는 청년들이 관계 자체를 기피한다기보다 친밀감을 쏟는 대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할 수 있다.셋째, 경제적 불안이 가족 의존을 키우고 있다. 이와 관련해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전국 만 13~5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6 가족관계 및 부모·자녀 관계 인식 조사’는 이 흐름을 숫자로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엄미새'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는 응답은 전체 48.5%였는데, 10대는 55.5%, 20대는 63.0%로 젊은 세대일수록 인지도가 확연히 높았다. 가족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부모에게 의지하는 자녀'라고 인식한 비율도 10대 76.0%, 20대 59.0%에 달했고, 부모에게 가장 의지하는 영역은 경제적 지원(37.4%, 복수응답)이 1위였다. 특히 10대(69.5%)와 20대(56.8%)의 경제적 의존도가 두드러졌다. 응답자의 60.0%는 “경제 불안이 엄미새 현상을 키우고 있다”라고 답했고, 확산 이유로는 취업·경제 불안(34.5%)이 가장 많이 꼽혔으며 혼자 결정하기 어려움(31.8%), 정서적 외로움(30.5%)이 뒤를 이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가족에 대한 의존이 강해질 것이라는 응답도 61.4%로 절반을 훌쩍 넘었다.넷째, 부모 세대 자체가 달라졌다. 40~50대 부모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인터넷과 SNS, 대중문화를 자녀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자녀와 함께 릴스를 찍고, 여행을 떠나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세대 간 문화적 간극이 줄어들면서 부모가 훈육자에서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이렇게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충분하니 엄미새라는 트렌드가 형성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과연 이 트렌드를 하나의 문제적 현상으로만 바라볼 것이냐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엄미새 트렌드를 다루는 기사들을 보면 청년의 독립 지연, 경제적 취약성, 관계 맺기의 피로감처럼 다소 우려 섞인 시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런 배경이 실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현상을 오로지 청년 세대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난 결과로만 해석하는 건 절반의 진실만 보는 것일 수 있다.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의 부모-자녀 관계는 과거와 구조 자체가 다르다. 한 가정에 자녀가 서넛이던 시절과, 한 명이나 많아야 두 명인 지금은 부모가 자녀 한 사람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의 총량이 다를 수밖에 없다. 형제자매와 나눠 갖던 부모의 관심이 이제는 오롯이 한 명, 혹은 두 명에게 집중됩니다. 자연스럽게 부모와 자녀는 ‘보호자와 피보호자’를 넘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취향을 나누는 밀도 높은 관계로 발전할 여지가 커진 셈이다.실제로 앞의 엠브레인 조사 결과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 관계 변화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신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부모와의 관계를 ‘베스트프렌드 같은 사이’라고 답한 비율은 전체 21.5%였는데, 10대는 30.5%, 20대는 26.1%로 평균보다 높았다. 자녀를 둔 응답자의 84.6%는 자녀와의 관계가 가깝다고 답했고, 부모와 자녀가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는 ‘일상 공유(71.2%)’였습니다. 과거의 부모-자녀 관계가 훈육과 통제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일상과 취향을 나누는 수평적 관계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이상적인 부모·자녀 관계를 묻는 질문에서도 ‘깊은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안전기지’가 43.1%로 가장 많이 꼽혔고, ‘독립적으로 생활하되 필요할 때 언제든 연결되는 느슨하지만 단단한 관계’가 35.8%로 뒤를 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응답자의 58.7%가 가족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부모와 너무 가까우면 독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데도 절반 이상(50.8%)이 공감했다는 점이다. 즉 엄미새는 부모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무조건적 의존이라기보다, 불안한 시대 속에서 부모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정서적 안전망으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독립성과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세대가 나름대로 찾아낸 관계 방정식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이런 맥락에서 보면 엄미새 현상은 사회적으로 오히려 안정감을 더하는 요소로 읽을 수도 있다. 청년들이 극심한 취업난과 경제적 불확실성, 관계 피로감 속에서도 완전히 고립되지 않고 기댈 수 있는 관계망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서적 지지 기반이 튼튼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형식적인 효도나 의무감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겁고 편해서 부모와 시간을 보내는 관계라면 이는 세대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세대 간 유대가 강화되는 신호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엠브레인의 조사에서도 젊은 층의 28.8%는 엄미새 트렌드를 ‘유쾌한 밈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40~50대에서는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현상’이라는 응답이 각각 31.5%, 35.0%로 나타나 세대 간 시각차도 여전히 존재한다.)물론 이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친밀함과 독립성 사이의 균형이 전제되어야 한다. 부모에게 정서적으로 기대는 것과,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삶의 영역을 지켜나가는 것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 조사에서도 청년들은 부모를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안전망으로 여기면서도, 진로와 연애, 생활방식만큼은 존중받기를 원한다는 결과가 함께 나타났다. 엄미새를 무조건 미화할 필요도, 무조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이유이다.엄미새 현상이 주목을 받고 있으니 시장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기업과 기관들은 엄미새가 특히 엄마와 딸과의 관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을 포착하고, ‘가족’이라는 넓고 막연한 타깃 대신 ‘모녀’라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관계를 겨냥한 마케팅이 속속 전개하고 있다.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풀무원이었다. 풀무원은 어버이날을 맞아 모녀 전용 1박 2일 체험 프로그램인 ‘스테이풀무원’을 운영하면서, 대상을 가족 일반이 아닌 모녀로 좁혔다. 두부 만들기, 싱잉볼 명상, 전문 작가의 모녀 스냅 촬영 등 프로그램 구성 자체를 ‘엄마와 딸이 함께 남기는 추억’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었고, 효도나 봉양이라는 무거운 프레임 대신, 함께 즐기는 취미 활동이라는 가벼운 형태로 접근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패션 브랜드 찰스앤키스는 신조어를 그대로 끌어온 어버이날 이벤트 문구인 “모든 엄미새들을 응원합니다”로 눈길을 끌었다. 신조어를 별다른 가공 없이 그대로 광고 카피에 활용해, 엄마 덕질이라는 정서를 하나의 놀이 문화로 정의한 사례라 할 수 있다.당연히 엄미새 현상은 SNS 콘텐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는 몇 가지 문항에 답하면 ‘엄미새 지수’를 점수로 환산해 주는 ‘엄미새 테스트’ 콘텐츠가 큰 관심을 받았다. “12점 만점, 엄마 없이 못 살겠다!”와 같은 댓글이 이어지며 자발적인 공유와 확산을 이끌어 내면서 조회수를 끌어 올렸다. 2인 1조로 설계된 경험을 제공하는 엄미새 관련 포토부스나 굿즈도 선보였다. 홍대 등지의 즉석사진 부스에서는 머리띠나 소품을 맞춰 쓰고 포즈를 취하는 모녀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커플룩을 맞춰 입고 팝업스토어나 공연장을 찾는 모녀도 늘고 있다. 이는 브랜드가 별도로 기획하지 않아도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마케팅 자산이지만, 최근에는 브랜드들이 이런 흐름을 읽고 1인용이 아닌 2인 세트 구성의 상품이나 포토존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메시지를 ‘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할 장면’을 중심으로 다시 짜는 것이 핵심이다.위의 마케팅 사례의 공통점은 명확해 보인다. 첫째는 타깃을 개인이 아니라 관계 단위로 잡는다는 것, 둘째로는 효도라는 의무의 언어 대신 동질감과 취향 공유라는 즐거움의 언어를 쓴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그 경험을 SNS에 자랑하고 싶게 만드는 장치를 심어둔다는 것이다. 엄미새는 소비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정체성이기 때문에, 브랜드가 이를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정서를 정확히 포착해 무대를 마련해주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으로 통하고 있는 셈이다.엄미새 트렌드에는 분명 부정적인 사회 압력이 압축되어 담겨있지만, 청년 세대가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자신을 지탱해 줄 견고한 관계를 스스로 찾아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는 긍정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엄미새 트렌드가 보여주는 친밀함과 독립성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안정적인 정서적 기반이 있을 때 더 건강한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엄미새 트렌드는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 딸바보 대표라고 불리는 입장에서 보자면, 왜 ‘엄미새’는 있는데 ‘아미새(아빠에 미친 자녀)’란 표현은 없는지. 그만큼 아빠라는 존재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혹여 옅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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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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