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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8] 침묵이라는 이름의 배려, “대화를 거절합니다”

  •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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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8침묵이라는 이름의 배려, “대화를 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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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상황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기사님께 춥다고 말하거나 천천히 운전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부탁으로 인해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조용하고 편안한 나의 소중한 시간이 날아가 버릴까봐 사실 주저하게도 된다. 애당초 택시앱으로 호출할 때, ‘기사님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에 체크를 했으니 이런 대화를 먼저 꺼내는 것도 난감하기도 하고.

자 이런 상황에서 만일 ③번과 같이 스마트폰 택시앱에 천천히 가달라고 하거나, 차내 온도를 올려달라는 옵션 버튼이 있다면 아주 좋을 것 같지 않을까.

그런데 이걸 현실에 구현한 택시회사가 있다. 일본 산와(三和)교통의 택시에는 보조석 뒷면에 태블릿이 부착되어 있는데, 이 태블릿은 다섯 개의 서비스를 터치 한번 만으로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간편하게 기사님에게 전달할 수 있다.

① TUTLE TAXI 모드: 말 그대로 ‘거북이 모드’로, 평소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러운 운전을 부탁한다. 

② 침묵 모드: 가능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부탁한다. 

③ 따뜻한 모드: 차내 온도를 높여달라고 부탁한다.

④ 시원한 모드: 차내 온도를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⑤ 생수 구매 모드: 생수 한 병을 부탁한다. (가격은 약 1,000원으로 요금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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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https://asset.watch.impress.co.jp/img/trw/docs/1476/307/01_l.jpg


이 택시회사가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게 된 이유는, 승차 손님이 기사님에게 뭘 부탁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물론, 기사님이 말을 거는 행위가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

편안하고 조용한 공간, 하지만 고객의 요망사항이 충족될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말하자면 고객이 대화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침묵 서비스’를 제공하여 고객 만족도를 높이려고 했다.


침묵이 하나의 ‘상품’이 되고, 대화하지 않을 권리가 ‘옵션’으로 제공되는 시대가 되었다. 택시 앱에서 ‘기사님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를 체크하고, 미용실 예약 시 ‘조용히 시술받고 싶어요’라는 칸에 체크하는 우리의 모습은 차가워 보일지 모르나, 그 이면에는 현대인들의 ‘침묵이라는 이름의 배려’와 ‘대화 선택권의 욕구’가 숨어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연결’이라는 단어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의 알림음은 24시간 우리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고, SNS의 타임라인은 타인의 일상으로 빼곡하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에 노출된 그런 우리에게, 이동 중인 택시 안이나 머리를 만지는 미용실 의자는 몇 안 되는 ‘외부와의 단절’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우리는 종종 ‘친절’이라는 이름의 침범을 겪곤 했다. 기사님의 정치적 견해나 미용사분의 사적인 질문은 때로는 다정한 안부였지만, 여기에 이런저런 대꾸를 하다 보면 쓸데없이 내 감정을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드디어 2016년 무렵, ‘침묵 서비스’라는 용어가 처음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아모레퍼시픽 브랜드인 이니스프리의 일부 매장은 입구에 ‘혼자 볼게요’와 ‘도움이 필요해요’라고 적힌 바구니를 두고, 직원은 ‘도움이 필요해요’라는 바구니를 든 고객에게만 다가가서 안내 등의 대화를 하도록 했다.

올리브영도 비슷한 시기에 직원의 고객 응대 대응 매뉴얼에서 입장 고객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라고만 말하고 먼저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즈음에 일본 교토의 미야코 택시회사가 ‘기사가 승객에게 말을 거는 것을 자제합니다’라는 문구를 붙인 ‘침묵 택시’를 시범 운행했다는 소식도 뉴스로 전해졌다.

이제는 이런 침묵 서비스가 미용실, 네일숍, 피부관리실, 왁싱숍 등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침묵 서비스에 소비자의 긍정적 반응을 보면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조선일보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용실/택시 등의 ‘조용히 옵션’에 대해 79.9%의 응답자가 긍정적이라고 대답했는데. ‘맞장구치는 행위가 피곤하다’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다시 말해 서비스를 받을 때, 내가 원하지도 않는 대화를 하느라 신경을 써야 하고, 특히 기사님이나 미용사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감정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감정이 소모되는 상황이 너무나 싫은 것이다.

지금까지 ‘서비스를 잘 받으려면 제공자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어’라는 인식에서, ‘굳이 내가 돈을 내면서 왜 제공자의 눈치를 봐야 하지. 그렇게까지 나의 정신적, 심리적 에너지를 쓰고 싶지는 않아’라는 인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침묵 서비스 확산의 트렌드 배경에는 소유보다 경험을,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MZ세대의 심리도 깊게 깔려 있다. 이들은 무의미한 스몰 토크(small talk)를 이어가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창밖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온전한 휴식을 취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대인이 침묵의 서비스를 원한다고 해서, 소통의 단절까지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관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꼭 필요한 정보만 주고받고,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대적 예의라는 믿음이 관계 미니멀리즘의 핵심이다. “말을 걸지 말아 주세요”라는 요청은 상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조용한 고백인 셈이기 때문이다.


서비스 제공자 관점에서 보자면, 침묵 서비스의 확대는 ‘고객에 대한 친절’을 재정의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언젠가부터 서비스 제공자의 친절을 담은 대화를 부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불안감도 있고, 듣기 싫은 정치 이슈를 강제로 들어야 하고, 상대방의 정서에 자신의 정서가 동조하지 못하면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다. 

친절과 부담은 다르다는 걸 서비스 제공자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나에게 진정한 친절을 베풀라”고 말이다.

서비스 산업에서 과거의 친절이 ‘살가운 대화와 풍부한 리액션’이었다면, 오늘날의 친절은 ‘고객이 원하는 거리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택시는 앱 기반 호출 서비스의 보편화로 대화 없이도 목적지 전달이 가능해졌고, 뷰티나 패션 업계는 ‘조용함을 원하는 손님’을 위한 전용 좌석이나 태그를 도입하여 심리적 문턱을 낮추고 있다. 유통 업계도 이니스프리의 ‘혼자 볼게요’ 바구니처럼 최소한의 점원 응대가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이처럼 조금 떨어진 물리적, 심리적 거리에서 고객이 어떤 점에서 불편을 느끼는지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거리감을 통한 니즈 충족’이 진정한 친절이라는 것을 서비스 제공자들이 깨달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는 서비스 제공자에게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손님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화제를 찾아야 하는 감정 노동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침묵은 이제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 모두를 보호하는 하나의 안전장치가 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누군가는 이런 침묵 서비스가 확산하는 세상을 삭막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연한 대화 속에서 얻는 삶의 지혜나 따뜻한 위로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화 선택권을 반기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떠밀리듯 하는 대화가 아니라, 내가 준비되었을 때 내가 원하는 이와 나누는 밀도 있는 대화.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일상의 사소한 소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연습을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침묵 서비스는 단순히 입을 닫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택시 문을 닫고 정적이 흐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다.

가위질 소리만 들리는 미용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 적막은 결코 차가운 벽이 아니다. 오히려 지친 영혼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투명한 방어막이다.

앞으로 침묵 서비스는 더욱 세분화하고 일상화될 것이다. 그것이 기술의 발전 때문이든, 인간관계의 피로 때문이든 분명한 것이 있다.

바로 우리는 이제 ‘함께 있지만, 혼자일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침묵이라는 이름의 배려가 흐르는 공간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