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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9]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의 모순적 트렌드, 텍스트 힙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하지만 문장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돈다. 누군가는 책장을 넘기지 않으면서도 텍스트를 곁에 둔다. 인스타그램의 캡션, 셔츠에 새겨진 짧은 문장, 커피 컵에 프린트된 짧의 시의 구절, 그리고 밈처럼 떠도는 철학자의 한 문장. 읽는 행위는 사라졌지만, 텍스트는 여전히 유행의 한복판에 있다.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의 트렌드로 떠오른 ‘텍스트 힙(text hip)’의 모습이다.텍스트 힙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멋지다는 뜻의 ‘힙하다’를 합성한 신조어로, Z세대를 중심으로 독서와 글쓰기를 멋지고 개성 있는 트렌디한 문화로 향유하는 현상을 의미한다.과거의 힙은 새로운 음악, 낯선 향, 혹은 반짝이는 디지털 감각에 속했다. 하지만 요즘의 힙은 놀랍게도 ‘글자’에 있다. 사람들이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누군가는 책의 밑줄친 문장을 캡처해 올리고, 누군가는 책을 다 읽지 않았어도 일부 문장을 인용한다. 어떤 이는 그저 문장이 예뻐서, 문장이 주는 분위기가 좋아서 책을 사서 소장한다. 필사를 하기도 하고, 도서 전시회에 가서 멋진 문구가 적힌 에코백, T셔츠, 키링과 같은 굿즈를 사기도 한다. * AI 생성 image그렇다. 이제 문장은 더 이상 지식의 통로가 아니라 감각의 장식이 되었다.그래서 텍스트 힙 트렌드는 읽지 않는 시대의 글자 소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통계로 보자면 한국의 독서율은 매년 하락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 독서 실태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중 1년간 종이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은 32.3%에 불과하다. 10명 중 7명은 1년 내내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지표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SNS에는 끊임없이 글귀 이미지나 문학적 어구들이 떠돈다.서점은 여전히 문장을 인쇄한 굿즈로 넘쳐나고, 명품 브랜드조차 인용문 티셔츠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글이 소비되는 현상. 이 모순은 단순히 ‘읽지 않으면서 지적인 척하는 세태’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텍스트가 지식에서 감성으로, 감성에서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예전의 독서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정보를 얻고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텍스트 힙은 ‘누군가와 공감하거나 공명하기’ 위한 루틴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어쩌면 문장을 통해 생각하지 않고, 문장을 통해 분위기를 만드는 듯이.그래서 이 텍스트 힙이라는 문자 속 행간을 풀어내고 싶어지기도 한다.그러려면 우선 힙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힙하다’는 말은 원래 ‘남보다 한발 앞선 감각’을 뜻했다. 하지만 요즘의 힙은 조금 어렵게도 ‘나만 알고 있는 듯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감각’이다. 한때는 인디 음악이, 또 어떤 시기엔 빈티지 패션이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짧고 날카로운 텍스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문장은 더 이상 깊이를 통해 매혹하지 않는다. 오히려 짧고 이해하기 쉬운, 그러나 의미심장해 보이는 문장이 힙하다고 평가받는다. 예를 들자면 다음의 문장처럼.“너무 사랑해서 슬프다.”“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아마 사소했던 순간에서.”이 짧은 문장들은 수많은 피드에서 반복된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어딘가 ‘감정의 깊이’를 암시한다.* image by sewonkim from unsplash      사람들은 이 문장들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고, 또 타인을 끌어들인다. 지금 시대의 텍스트는 독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프레임이다. 그리하여 ‘읽기’보다 ‘공유하기’가 더 중요하다.그럼 왜 우리는 텍스트로 힙해지고 싶은 걸까?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적 이미지는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실제로는 긴 글을 읽을 여유가 없지만, 문장이 주는 인상은 강하다. 어떤 문장들은 무게를 지니고, 사람을 성찰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SNS에서 문장 수집을 하는 행위는, 지식인을 모방하면서도 감성을 연출하는 새로운 자기 연출법이다. 이때의 문장은 정체성의 메이크업이다. 내면의 결핍을 감추면서 동시에 감각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그러니 소비 트렌드의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 힙은 분명 심리적 보상 소비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생각할 시간은 부족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감각은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장을 품는다. 행간의 의미를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느낌’이니까.텍스트 힙을 소비자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의 이미지 소비’의 특징도 발견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텍스트를 읽는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 대상으로 소비한다. 짧은 캡션, 화면에 떠오르는 한 줄, 영상에 삽입된 문장 자막 등등. 텍스트는 이미지의 일부가 되었고, 문장은 시각적 요소로 작동한다. 글자를 읽는 행위는 장시간의 이성적 해석의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글자가 이미지로 소비되면 즉각적인 느낌에 투자되는 아주 작은 에너지만이 요구된다.이렇게 텍스트는 보여지는 시각적 언어로 진화했다. 누군가는 예쁜 손글씨로 한 문장을 쓰고, 누군가는 문장 이미지를 스토리에 올린다. 그 행동은 일종의 의식과 같다. 실제로 이해하지 않아도, 문장을 곁에 두는 행위만으로도 위로를 느낀다.이렇게 현대인은 문장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생성하고, 자신을 꾸민다. 이를 위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문장을 통해 설계한다. 문장은 그 사람의 세계관, 취향, 감정의 결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SNS 속 문장은 일종의 감정의 브랜딩, 문장으로 꾸미는 자아가 된다.그래서 각자 추구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텍스트를 선택한다. 촌스럽지 않은 감정노출을 원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구로 마음을 표현한다. 대놓고 “슬프다”고 쓰지 않고, 대신 “어제의 공기가 이상했다.”라고 말한다. 감정의 심도를 유지하면서도 세련됨을 잃지 않는 방식. 이런 언어의 절제가 ‘힙한 텍스트’의 정체인 셈이다.이 텍스트 힙의 트렌드에는 어쩌면 ‘공감 피로의 시대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현대인은 끊임없이 감정을 노출하고 공유하지만, 정작 속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피로감을 느낀다. 하지만 텍스트 힙의 짧은 문장은 이런 피로감을 우회하여 자신의 감성과 감정을 적절하게 전달해 준다. 마치 이렇게 호소하듯이.“이 한 문장으로 모든 걸 이해해줘.”그러니 공유되는 텍스트는 타인에게 보내는 간결한 신호이자, 감정을 최소한으로 번역한 언어인 셈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발신하는 언어들이 상대방에게 읽히기를 원하긴 하지만, 이 언어에 대해 굳이 설명하고 싶다는 마음은 갖지 않는다. 그래서 한마디로 텍스트 힙은 공감 피로 시대의 감정 미니멀리즘이라 할 수 있다.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를, 농축한 한 문장이 사람을 대신해 말해 준다.성인 10명 중 7명이 1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시대. 지금 우리 사회는 책을 읽는 행위는 줄었지만, 흘러가는 문장은 더 늘어났다. 흥미롭게도, 이런 빠르게 소비되는 문장들이 오히려 더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더해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마치 향수의 잔향처럼 짧은 문장이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서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텍스트 힙은 긴 문장을 읽고 문장 속의 담긴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무겁고 진지한 사유의 부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어쩌면 ‘무겁고 진지한 사유’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유를 흉내 내며, 문장을 통해 그 빈틈을 채운다. 아이러니하게도, 텍스트 힙은 사유의 모조품이자 그 갈망의 증거다.많은 사람이 “요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사실 우리는 “여전히 생각하고 싶다!”고 이렇게 텍스트 힙을 빌어서라도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긴 글 대신 짧은 문장, 이해 대신 감각, 독서 대신 수집. 텍스트 힙은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와 사회가 보여주는 사유의 마지막 흔적이자, 사유의 부재를 슬퍼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자 그럼, 우리는 검은 활자가 가득 채워진 책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걸까?2시간 영화도 2배속으로 보다보니 15분이 넘는 동영상은 시청하기 어려워 숏폼으로 핵심만 쏙쏙 빼먹는 시대. 역시 긴 호흡의 책은 과연 몇 개의 문장으로 대체되고 마는 걸까? 흥미롭게도, 텍스트 힙 덕분에 사람들은 다시 책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연예인이 읽고 있다는 책에 흥미를 느끼고, 드라마에 나오는 책을 구매하고, 화제가 되는 작가의 한마디를 찾으려고 서점이나 도서관을 찾는다. SNS에 떠있는 짧은 한 줄의 텍스트를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출처를 찾아보기도 한다.이렇게 밈으로 소비되고 있던 문장이 실제 작품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를 찾아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읽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그래서 텍스트 힙은 어쩌면 읽기의 회복을 위한 우회로일지도 모른다. 문장을 소유하려는 욕망 끝에서, 우리는 다시 이렇게 텍스트의 생명력을 만난다.책을 읽는 일이 사라져도, 텍스트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그 존재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더 이상 텍스트는 깊이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각과 이미지로 읽힌다.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리터러시일지도 모른다.바로 ‘문장을 통해 사유하지 않아도, 문장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이라는 리터러시.그렇게 텍스트는 여전히 힙하고, 텍스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언어 속에서 살고 있고 언어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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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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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국내 뷰티 소비자 10명 중 4명, 화장품 구매 과정에서 AI 활용

제품 탐색은 AI, 구매는 올리브영…뷰티 소비 여정 변화[더케이뷰티사이언스] 국내 뷰티 소비자 가운데 약 10명 중 4명은 화장품 구매 과정에서 대화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품 추천보다는 성분과 기능 정보를 정리하고 비교하는 ‘지능형 검색 도구’로 AI를 활용하는 소비 행태가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데이터 수집 플랫폼 픽플리(Pickply)가 조사연구컨설팅 기업 올림(OLIM)과 함께 발표한 ‘2026년 1분기 뷰티 산업 소비 여정 리포트’에 따르면 최근 3개월 내 뷰티 제품 구매 경험이 있는 소비자 2,000명 가운데 37.5%가 구매 과정에서 AI를 활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ChatGPT 이용률 63.7%AI 서비스 가운데에서는 ChatGPT 이용률이 63.7%로 가장 높았고, 구글 제미나이(Google Gemini)가 25.8%로 뒤를 이었다. 소비자들이 AI에 기대하는 기능은 상황에 맞는 제품 추천(27.7%), 성분·기능·효과 정보 제공(19.9%), 예산 범위 내 제품 추천(17.5%) 순으로 나타났다.구매 빈도와 AI 활용률 사이에는 뚜렷한 상관관계도 확인됐다. 최근 3개월 동안 5회 이상 뷰티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의 AI 활용률은 45.7%였다. 반면 1회 구매 소비자는 24.7%에 그쳤다. 구매 경험이 많을수록 제품 비교와 정보 탐색 과정이 복잡해지면서 AI를 정보 필터링 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으로 분석된다.이번 조사 결과는 뷰티 소비 구조에서 ‘AI 기반 정보 탐색 → 온·오프라인 구매’로 이어지는 새로운 소비 여정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SNS 콘텐츠와 커뮤니티 리뷰가 제품 탐색의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AI가 성분과 효능 정보를 정리하는 새로운 소비 접점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2030 여성, 가장 적극적인 뷰티 소비층성별·연령별 소비 행태를 보면 2030 여성은 가장 적극적인 뷰티 소비층으로 나타났다. 최근 3개월 동안 5회 이상 제품을 구매한 비율이 34.7%였고 소비 금액은 10~20만 원대(29.0%)가 가장 높았다. 이들은 스킨케어(52.9%)와 메이크업(36.2%)을 함께 소비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4050 여성은 구매 빈도보다는 지출 규모가 큰 특징을 보였다. 20만~50만 원 미만 소비 비중이 22.0%로 다른 집단보다 높았으며 스킨케어 제품 비중(55.2%)이 가장 높았다.남성 소비자는 전반적으로 스킨케어 중심의 실용 소비가 나타났다. 2030 남성은 스킨케어 비중이 70.8%로 가장 높았고 소비 금액은 5~10만 원대(37.0%)가 많았다. 4050 남성 역시 스킨케어(59.4%)가 주력 품목이었지만 바디·헤어 제품 비중(33.4%)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뷰티 디바이스 정보 탐색 단계유튜브서 뷰티 디바이스 정보 탐색 제품군별 구매 여정을 분석한 결과, 스킨케어와 메이크업 시장에서는 올리브영의 채널 지배력이 두드러졌다.스킨케어 제품의 정보 탐색 단계에서 온라인 올리브영은 30.6%, 오프라인 올리브영은 68.9%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실제 구매 단계에서도 온라인 31.5%, 오프라인 69.8%로 높은 비중을 보였다. 스킨케어 구매의 출발점은 대부분 ‘구매할 때가 되어서’라는 응답(64.8%)이었다.메이크업 제품 역시 올리브영 중심 구조가 이어졌다. 온라인 구매 채널에서는 올리브영이 42.4%, 오프라인에서는 72.2%로 가장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다. 다만 제품 인지 과정에서는 SNS 영향력이 더 크게 나타났다. SNS 및 광고 콘텐츠 노출을 통한 인지 비중은 37.9%였으며 유튜브(38.3%)와 인스타그램(30.3%)이 주요 채널로 조사됐다.반면 바디·헤어 및 뷰티 잡화 제품은 채널 구조가 분산된 모습을 보였다. 온라인 정보 탐색에서는 네이버 검색(20.1%), 쿠팡(16.4%), 올리브영(14.6%), 네이버 쇼핑(14.2%) 순이었다. 실제 온라인 구매에서는 네이버 쇼핑(32.5%)과 쿠팡(21.9%)이 1·2위를 차지했고 올리브영은 11.4%로 3위에 머물렀다. 가격 비교와 배송 편의성이 중요한 실용 소비재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분석된다.뷰티 디바이스는 다른 제품군과 달리 고관여 소비 특성이 나타났다. 인지 단계에서는 인스타그램(58.3%)의 영향력이 가장 컸고 지인 추천 비중도 18.2%로 높았다. 정보 탐색 단계에서는 유튜브(25.8%)가 주요 채널로 나타났으며 구매 단계에서는 네이버 쇼핑(28.6%)과 브랜드 공식 홈페이지(25.0%)가 주요 경로로 조사됐다.출처 : 더케이뷰티사이언스(주)국내 뷰티 소비자 10명 중 4명, 화장품 구매 과정에서 AI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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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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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Lounge_8] 리서처가 마주하는 거대한 모자이크, 데이터 파편화

오후 2시, 사무실은 건조한 히터 바람과 타자 소리로 가득 찼다. 입사 4년 차, 강민우 대리는 자신의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직함은 ‘시니어 리서처’였지만, 민우는 스스로를 디지털 고물상이라 불렀다.“대리님, A사 화장품 프로젝트 데이터 다 통합(merge)됐어요?” 옆자리의 신입, 지은 씨가 해맑게 물었다. 민우는 얼굴을 한번 쓱 문지르고는 대답했다. “지은 씨, 데이터는 통합되는 게 아니야. 그냥 접착제로 억지로 붙여놓는 거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로.”이번 조사의 클라이언트는 2030 여성 대상의 코스메틱 브랜드. 그들의 요구는 심플했다.“고객이 우리 제품을 인지하고 구매하기까지의 완벽한 여정(customer journey map)을 그려주세요.”문제는 그 여정이 고속도로가 아니라, 폭격 맞은 비포장도로처럼 끊겨 있다는 점이었다. 민우는 한숨을 쉬며 엑셀 파일을 열었다.민우의 모니터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세계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지긋지긋한 ‘데이터 파편화’의 실체였다.[세계 1: 설문조사 속의 김지영] 설문조사 결과 파일 속 소비자 김지영(가명, 28세) 씨는 매우 이성적이었다. 그녀는 구매 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친환경 성분’과 ‘기업의 윤리’를 꼽았다. 텍스트만 보면 그녀는 완벽한 개념 소비자였다.[세계 2: 검색 데이터 속의 김지영] 하지만 검색 키워드 분석 툴이 보여주는 김지영 씨는 딴판이었다. 성분이나 윤리는 순위권 밖이었다. 압도적 1위는 ‘올영 세일 추천템’, 2위는 ‘000 토너 1+1’, 3위는 ‘좁쌀 여드름 박멸’이었다. 여기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가격에 민감하며, 즉각적인 효능을 갈구하는 소비자였다.[세계 3: 행동 데이터 속의 김지영] 마지막으로 자사 몰 로그 데이터의 김지영 씨는 또 달랐다. 그녀는 새벽 2시에 비회원으로 접속해 결제했다. 쿠키가 만료되어 그녀가 아까 그 설문조사의 김지영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 AI 생성 결과를 수정한 이미지  “이봐, 강 대리.” 팀장인 박 부장이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거 ‘싱글 뷰(Single View)’로 쫙 뽑히지? 인스타에서 보고, 네이버 검색하고, 앱에서 산 거 한 줄로 꿰어서.”민우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부장님, 그건 유니콘 같은 겁니다. 인스타의 김지영과 네이버의 김지영을 연결하려면 주민등록번호라도 받아야 해요. 지금은 그냥 다 다른 사람 취급이라고요.” “에이, 전문가가 왜 그래? 비식별 결합 기술 있잖아. 그럴듯하게 연결해 봐. ‘추정’이라고 각주 달고.”박 부장은 ‘그럴듯하게’라는 폭탄을 던지고 사라졌다. 민우는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읊조렸다. “데이터가 파편화된 게 아니라, 내 멘탈이 파편화되고 있군.”야근은 필연적이었다. 서베이와 검색, 그리고 행동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건 과학이라기보단 문학에 가까웠다.민우는 파편화된 데이터를 억지로 기워 맞추며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소비자는 '가치 소비'를 지향하나, 고물가로 인해 ‘할인’이라는 자극이 주어질 때만 지갑을 엽니다.”사실은 그냥 싸니까 산 거겠지만, 보고서엔 그렇게 쓸 수 없었다.가장 큰 골칫덩어리는 숏폼이었다. 틱톡과 릴스 데이터는 API 제한으로 긁어올 수가 없었다. 민우는 영상 하나하나를 눈으로 보며 엑셀에 수기로 태그를 달았다. [영상 1: 표정 밝음 / "개꿀"] [영상 2: 찌푸림 / "별로"]최첨단 AI 시대를 사는 데이터 연구원이, 모니터 앞에서 원시인처럼 표정 읽기를 하고 있다니. 데이터는 흩뿌려진 별가루 같았고, 민우는 빗자루도 없이 맨손으로 그걸 쓸어 담고 있었다.프레젠테이션 당일. 클라이언트 마케팅팀장은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여성이었다. “저기, 연구원님. 자사 몰 장바구니 이탈률이 70%인데, 보고서엔 이 사람들이 유튜브를 보고 다시 돌아온다고 돼 있네요? 근거가 뭐죠?”민우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보고서의 내용은 부장님 말대로 추정한 것이었으니까. “아, 그건… 데이터 파편화로 직접 추적이 어려운 구간이라, 검색량과 조회수로 시계열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는 아니잖아요?”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때 팀장이 덧붙였다.“제 조카 보니까 SNS에서 보고 카톡 선물하기로 사달라고 조르던데, 그런 건 데이터 어디에 있어요?”민우는 쓴웃음을 삼켰다. 카카오톡이나 DM 같은 사적인 채널은 분석가가 볼 수 없는 블랙홀이다. 그는 솔직해지기로 했다.“팀장님, 맞습니다. 현재 데이터 환경에선 그 사각지대를 볼 수 없습니다. 저희는 흩어진 뼈조각으로 공룡을 복원하는 고고학자와 같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파편화된 채널 속에서 고객들이 엄청난 정보 피로감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 팀장이 피식 웃었다. “사각지대라….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아는 것도 결과긴 하죠. 알겠습니다.”프로젝트는 무사히(?) 끝났다. 자리로 돌아온 민우에게 새 메일이 와 있었다. Z세대 남성의 편의점 하이볼 구매 요인 분석을 부탁하는.민우는 허탈하게 웃으며 새 탭을 열었다. “이번엔 커뮤니티를 뒤져야 하나, 편의점 POS 데이터를 사야 하나.”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완벽한 Z세대 남성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디시인사이드의 익명 유저와 편의점 포인트 적립 안 하고 나가는 쿨한 손님 사이의 연결고리는 영원히 미지수일 테니까.어쩌면 아침엔 직장인, 밤엔 익명의 악플러, 주말엔 효자가 되는 우리네 삶 자체가 이미 산산이 조각난 파편일지도 모른다.“지은 씨, 엑셀 켜. 하이볼 마시는 유령들 잡으러 가보자.” 민우의 손가락이 다시 춤추듯 Alt + Tab을 눌렀다. 수많은 데이터 조각이 그의 안경알 위로 쏟아져 내렸다.소설처럼 그려본 어느 조사회사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모습이 반드시 소설 속의, 그러니까 가상의 모습뿐인 것은 아니다.현대 리서치 시장에서 연구원의 책상은 예전보다 훨씬 분주해졌다. 과거에는 설문조사 데이터(survey data) 하나만 잘 분석해도 소비자의 마음을 읽어냈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엑셀 시트뿐만 아니라, 로그 데이터, 소셜 리스닝 결과, 카드 결제 내역, 그리고 생성형 AI가 쏟아내는 비정형 데이터까지. 넘쳐나는 정보에 정작 진실을 보기에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런 어려움은 ‘데이터 파편화’가 만들어 놓은 산물이다.데이터 파편화는 단순히 데이터의 양이 많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맥락의 단절을 의미한다. 조사 대상자의 움직임을 볼 수 엿볼 수 있는 각종 플랫폼의 정보는 분산되어 있고, 서로 형식도 맞지 않을뿐더러, 정성 데이터의 언어도 서로 다르다. 게다가 실시간 트렌드 데이터와 분기별 추적 조사 데이터 간의 시차도 발생한다.푸드 업계의 조사를 담당하는 A 대리는 “설문조사에서는 80%가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을 사겠다’고 답했는데, 실제 이커머스 매출 데이터에서는 저가형 비친환경 제품이 완판되었네. 과연 무엇이 진짜 소비자의 마음일까?”를 고민한다.플랫폼 담당 B 팀장은 “앱 로그 데이터를 보면 체류 시간이 길어 긍정적인 줄 알았는데, CS 데이터를 보니 인터페이스가 불편해서 헤매고 있던 것일 뿐이었네. 파편화된 수치만 믿었다가 큰일 날 뻔했군.”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처럼 데이터가 조각나 있을 때, 연구원은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코끼리 전체를 설명해야 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술이 아닌 사람, 그러니까 리서치 연구원의 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데이터 파편화는 연구원에게 세 가지 심리적 압박을 준다.우선 완전성에 대한 집착과 불안이다. “내가 보지 못한 데이터에 결정적인 단서가 있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은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완벽한 결론을 내리지 못할 것 같은 공포를 야기한다.확증 편향의 유혹도 있을 것이다. 파편화된 데이터 중 내 가설에 유리한 조각들만 골라 맞추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면, 객관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가장 문제는 번아웃이다. 서로 다른 영역의 데이터를 맞추어 나가는 작업은 시간과 땀과 눈물을 요구한다. 이렇게 피로가 누적되는 과정에서 연구원의 창의적 에너지는 고갈되고 말 것이다.그래서 연구원은 자신을 ‘데이터 큐레이터(curator)’라고 여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이제 파편화된 조각들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단순한 분석가(analyzer)를 넘어서, 그 조각들 사이의 연결고리(context)를 찾아내는 큐레이터라고 생각해 보자.데이터가 왜 파편화되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고, 누락된 데이터가 주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파편화 데이터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일 테니, 이에 대한 이해의 힘을 이르는 인문학적 소양도 가져야 한다.그래서 이런 데이터 파편화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필요도 있다.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써 말이다.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통일된 데이터는 차별화된 통찰을 주지 못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데이터 조각들을 나만의 시각으로 엮어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낼 때, 연구원의 가치는 비로소 빛을 발할 것이다. 나는 과연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리고 중간중간 구멍이 난 세상의 데이터를 하나로 그러모아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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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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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8] 침묵이라는 이름의 배려, “대화를 거절합니다”

위의 두 상황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기사님께 춥다고 말하거나 천천히 운전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부탁으로 인해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조용하고 편안한 나의 소중한 시간이 날아가 버릴까봐 사실 주저하게도 된다. 애당초 택시앱으로 호출할 때, ‘기사님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에 체크를 했으니 이런 대화를 먼저 꺼내는 것도 난감하기도 하고.자 이런 상황에서 만일 ③번과 같이 스마트폰 택시앱에 천천히 가달라고 하거나, 차내 온도를 올려달라는 옵션 버튼이 있다면 아주 좋을 것 같지 않을까.그런데 이걸 현실에 구현한 택시회사가 있다. 일본 산와(三和)교통의 택시에는 보조석 뒷면에 태블릿이 부착되어 있는데, 이 태블릿은 다섯 개의 서비스를 터치 한번 만으로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간편하게 기사님에게 전달할 수 있다.① TUTLE TAXI 모드: 말 그대로 ‘거북이 모드’로, 평소보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러운 운전을 부탁한다. ② 침묵 모드: 가능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부탁한다. ③ 따뜻한 모드: 차내 온도를 높여달라고 부탁한다.④ 시원한 모드: 차내 온도를 내려달라고 부탁한다.⑤ 생수 구매 모드: 생수 한 병을 부탁한다. (가격은 약 1,000원으로 요금에 포함)*이미지: https://asset.watch.impress.co.jp/img/trw/docs/1476/307/01_l.jpg이 택시회사가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게 된 이유는, 승차 손님이 기사님에게 뭘 부탁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물론, 기사님이 말을 거는 행위가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었다.편안하고 조용한 공간, 하지만 고객의 요망사항이 충족될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말하자면 고객이 대화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침묵 서비스’를 제공하여 고객 만족도를 높이려고 했다.침묵이 하나의 ‘상품’이 되고, 대화하지 않을 권리가 ‘옵션’으로 제공되는 시대가 되었다. 택시 앱에서 ‘기사님과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를 체크하고, 미용실 예약 시 ‘조용히 시술받고 싶어요’라는 칸에 체크하는 우리의 모습은 차가워 보일지 모르나, 그 이면에는 현대인들의 ‘침묵이라는 이름의 배려’와 ‘대화 선택권의 욕구’가 숨어 있다.언젠가부터 우리는 ‘연결’이라는 단어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의 알림음은 24시간 우리의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고, SNS의 타임라인은 타인의 일상으로 빼곡하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에 노출된 그런 우리에게, 이동 중인 택시 안이나 머리를 만지는 미용실 의자는 몇 안 되는 ‘외부와의 단절’이 가능한 공간이었다.하지만 그곳에서도 우리는 종종 ‘친절’이라는 이름의 침범을 겪곤 했다. 기사님의 정치적 견해나 미용사분의 사적인 질문은 때로는 다정한 안부였지만, 여기에 이런저런 대꾸를 하다 보면 쓸데없이 내 감정을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그래서일까. 드디어 2016년 무렵, ‘침묵 서비스’라는 용어가 처음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아모레퍼시픽 브랜드인 이니스프리의 일부 매장은 입구에 ‘혼자 볼게요’와 ‘도움이 필요해요’라고 적힌 바구니를 두고, 직원은 ‘도움이 필요해요’라는 바구니를 든 고객에게만 다가가서 안내 등의 대화를 하도록 했다.올리브영도 비슷한 시기에 직원의 고객 응대 대응 매뉴얼에서 입장 고객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라고만 말하고 먼저 다가가거나 말을 걸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그즈음에 일본 교토의 미야코 택시회사가 ‘기사가 승객에게 말을 거는 것을 자제합니다’라는 문구를 붙인 ‘침묵 택시’를 시범 운행했다는 소식도 뉴스로 전해졌다.이제는 이런 침묵 서비스가 미용실, 네일숍, 피부관리실, 왁싱숍 등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침묵 서비스에 소비자의 긍정적 반응을 보면 앞으로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조선일보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용실/택시 등의 ‘조용히 옵션’에 대해 79.9%의 응답자가 긍정적이라고 대답했는데. ‘맞장구치는 행위가 피곤하다’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다시 말해 서비스를 받을 때, 내가 원하지도 않는 대화를 하느라 신경을 써야 하고, 특히 기사님이나 미용사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감정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감정이 소모되는 상황이 너무나 싫은 것이다.지금까지 ‘서비스를 잘 받으려면 제공자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어’라는 인식에서, ‘굳이 내가 돈을 내면서 왜 제공자의 눈치를 봐야 하지. 그렇게까지 나의 정신적, 심리적 에너지를 쓰고 싶지는 않아’라는 인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또 이런 침묵 서비스 확산의 트렌드 배경에는 소유보다 경험을,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MZ세대의 심리도 깊게 깔려 있다. 이들은 무의미한 스몰 토크(small talk)를 이어가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창밖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온전한 휴식을 취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대인이 침묵의 서비스를 원한다고 해서, 소통의 단절까지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관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꼭 필요한 정보만 주고받고,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대적 예의라는 믿음이 관계 미니멀리즘의 핵심이다. “말을 걸지 말아 주세요”라는 요청은 상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싶다는 조용한 고백인 셈이기 때문이다.서비스 제공자 관점에서 보자면, 침묵 서비스의 확대는 ‘고객에 대한 친절’을 재정의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언젠가부터 서비스 제공자의 친절을 담은 대화를 부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불안감도 있고, 듣기 싫은 정치 이슈를 강제로 들어야 하고, 상대방의 정서에 자신의 정서가 동조하지 못하면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런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다. 친절과 부담은 다르다는 걸 서비스 제공자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나에게 진정한 친절을 베풀라”고 말이다.서비스 산업에서 과거의 친절이 ‘살가운 대화와 풍부한 리액션’이었다면, 오늘날의 친절은 ‘고객이 원하는 거리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택시는 앱 기반 호출 서비스의 보편화로 대화 없이도 목적지 전달이 가능해졌고, 뷰티나 패션 업계는 ‘조용함을 원하는 손님’을 위한 전용 좌석이나 태그를 도입하여 심리적 문턱을 낮추고 있다. 유통 업계도 이니스프리의 ‘혼자 볼게요’ 바구니처럼 최소한의 점원 응대가 자리 잡아 가고 있다.이처럼 조금 떨어진 물리적, 심리적 거리에서 고객이 어떤 점에서 불편을 느끼는지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거리감을 통한 니즈 충족’이 진정한 친절이라는 것을 서비스 제공자들이 깨달은 결과이기도 하다.이러한 변화는 서비스 제공자에게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손님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화제를 찾아야 하는 감정 노동의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침묵은 이제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 모두를 보호하는 하나의 안전장치가 되었다고나 할까.물론 누군가는 이런 침묵 서비스가 확산하는 세상을 삭막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연한 대화 속에서 얻는 삶의 지혜나 따뜻한 위로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화 선택권을 반기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떠밀리듯 하는 대화가 아니라, 내가 준비되었을 때 내가 원하는 이와 나누는 밀도 있는 대화.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일상의 사소한 소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연습을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침묵 서비스는 단순히 입을 닫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택시 문을 닫고 정적이 흐를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다.가위질 소리만 들리는 미용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이 적막은 결코 차가운 벽이 아니다. 오히려 지친 영혼이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투명한 방어막이다.앞으로 침묵 서비스는 더욱 세분화하고 일상화될 것이다. 그것이 기술의 발전 때문이든, 인간관계의 피로 때문이든 분명한 것이 있다.바로 우리는 이제 ‘함께 있지만, 혼자일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침묵이라는 이름의 배려가 흐르는 공간에서,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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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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