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과 소식

올림은 무엇을 고민하는지 올림의 생각을 전합니다

컬럼과 소식 카테고리

62
게시물 검색
[Trend Insight_11] 내 손 안에서 확인하는 실존 _ 볼꾸와 다꾸 이야기

얼마 전 강의를 하러 갔다가 흥미로운 것을 마주했다. 앞자리에 앉은 수강생 한 명이 열심히 강의 내용을 필기하고 있었는데, 그의 볼펜을 보니 시판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볼펜에는 작은 캐릭터가 하나도 아니고 형형색색의 캐릭터가 대여섯 개나 붙어 있었고, 뒷부분은 키링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고리도 달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잡다한 장식품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름 예쁘게 장식을 한 특별한 볼펜이라는 느낌이었다.쉬는 시간에 “재미있고 특별한 볼펜이네요”라고 말을 건넸더니, 밝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요즘 제가 한참 볼펜 꾸미기에 빠져 있거든요. 줄여서 ‘볼꾸’라고 하는데, 여기 있는 캐릭터들이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에요.”그러고 보니 몇 년 전부터‘별다꾸’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다이어리 꾸미기인 ‘다꾸’부터, 신발 꾸미기인 ‘신꾸’, 가방 꾸미기인 ‘백꾸’, 텀블러 꾸미기인 ‘텀꾸’까지.스티커나 열쇠고리, 작은 플라스틱 장식, 캐릭터 소품 등을 이용해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표현하는 꾸미기가 MZ세대의 소비문화로 자리하면서 ‘별것을 다 꾸민다’라는 뜻으로 ‘별다꾸’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최근에는 연예인들의 포토카드나 폴라로이드 사진을 꾸미는 ‘폴꾸’나 기계식 키보드를 꾸미는 ‘키꾸’, 책상(데스크)를 꾸미는 ‘데꾸’ 등 어찌 보면 마니아틱한 꾸미기도 일종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듯하다.*AI가 만든, 좋아하는 걸그룹 굿즈로 꾸민 데꾸의 이미지두쫀쿠의 유행처럼 금방 사그라들 것처럼 보였던 이런 꾸미기 트렌드는 그 대상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처음 유행이 시작되고도 5, 6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지 않는 열기인 듯하다.그래서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왜 우리는 이것저것의 꾸미기에 열광하는지 말이다.이유 중에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우리가 소소한 일상에서 반란을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그간 고도성장기와 거대 담론의 시대를 거쳐왔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 사회는 저성장 기조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했다.미래의 거대한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청년 세대와 현대인들에게, 당장 내 손안에 쥐어진 ‘볼펜’과 ‘다이어리’와 같은 물건은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며, 나의 책상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토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볼꾸’와 ‘다꾸’, ‘데꾸’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우리는 꾸미기를 통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볼꾸와 다꾸의 유행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취미나 장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현상이 단순 ‘예쁜 것 좋아하는 MZ의 취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울 동대문종합시장 액세서리 부자재 구역에 가면, 주말도 아닌 평일 오후에 젊은 여성들, 학생들이 볼펜 몸통과 캐릭터 부품, 비즈 파츠를 고르느라 통로가 막힐 정도라고 한다. 그들이 그곳에서 구입하는 건 실용품으로서의 펜과 파츠가 아니라, 나만의 조합으로 완성된 하나의 작은 세계일 것이다.볼꾸는 기본 볼펜 몸통을 고른 뒤, 각종 캐릭터 비즈, 컬러 참, 미니 피겨를 조합해 ‘나만의 볼펜’을 만들어내는 DIY 체험 소비다. 다꾸는 다이어리 속지,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도장 등을 활용해 한 페이지를 작은 작품처럼 꾸미는 행위다. 어느 다꾸러의 표현대로, 한 장의 페이지는 “어떤 속지를 쓰고, 어떤 스티커를 어디에 붙일지”를 집요하게 고민한 끝에 완성되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기록을 남긴다’라는 기능보다 ‘나만의 구성을 창조한다’라는 경험에 더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점이다.이 작은 세계는 가격으로 보면 가벼운 장난감에 가깝다. 볼펜 몸통은 천 원 안팎, 파츠는 개당 몇백 원, 한 자루를 완성하는 데 5천 원 정도면 충분하다. 다이어리 속지와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도 개별 가격만 보면 부담이 크지 않다. 그러나 정서적인 무게로 보면, 이들의 볼펜과 다이어리는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안전한 공간이고, 나를 알아 봐주는 작은 방패이자, 온라인에서 나를 설명하는 프로필 이미지에 가깝다.꾸미기의 배경에는 과잉 경쟁과 차별화의 강박도 읽힌다. 간단히 말해 모두가 ‘그냥’은 싫은 사회의 씁씁한 모습이다.최근 볼꾸 열풍을 다룬 기사 중 눈에 띄었던 제목은 “볼펜 하나도 ‘그냥’은 안 돼!”였다. 이 문장은 우연한 수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오랜 경쟁 구조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학교에서, 취업 시장에서, 심지어 취미 생활까지 ‘그냥’은 허용되지 않는다. 남들과 비슷하게는 부족하고, 조금이라도 다르게, 더 특별하게 보여야 한다.MZ세대 소비를 분석하는 글에서도, 이들이 소비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희소성 있는 상품에 과열되다시피 하는 이유를 ‘정체성 드러내기’에서 찾는다.한정판 스니커즈나 아티스트 굿즈를 위해 줄을 서는 욕망은, 남들과는 다른 조합으로 펜을 만드는 볼꾸, 남들이 못 본 스티커·속지로 다이어리를 꾸미는 다꾸는 결국 같은 축에 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지금 우리 사회의 경쟁 구조에서 너무 쉽게 자극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더 이상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지 않다’라는 탈동질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완전히 혼자가 되기는 두렵다’라는 동조 욕구다. 볼꾸나 다꾸는 이 모순을 절묘하게 봉합한다. 모두가 ‘볼꾸 하는 중’이라는 해시태그 아래 모여 있으면서도, 각자의 펜과 다이어리는 조금씩 다르다. 비슷한 취향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미세한 차이를 내며 ‘나’를 주장할 수 있다.이런 미세한 차이에 에너지를 쏟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과도한 자기 관리와도 닿아 있다. 스펙, 외모, 말투, 취향까지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회는 ‘나를 관리하고 있다’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볼꾸나 다꾸는 이 부담스러운 자기 관리의 축을, 상대적으로 무해하고 가벼운 영역으로 옮겨버린다. 우리는 이력서와 자소서를 꾸미는 대신, 펜과 다이어리를 꾸미며 ‘나는 여전히 나를 디자인할 수 있다’라는 감각을 회복한다.하지만 무엇보다 꾸미기 트렌드는 가성비와 소확행의 결정판이기 때문에 좀처럼 식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자산 시장, 치솟는 집값, 불안정한 일자리 구조 속에서 MZ세대는 인생의 큰 레버를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주거, 직장, 경력 같은 거대 의사결정은 점점 더 운과 구조에 좌우되는 영역처럼 보인다. 이럴수록 사람들이 붙잡는 건 상대적으로 쉽게 조정 가능한, 작은 단위의 만족이다.경제·소비 전문가들은 MZ세대의 소비를 소확행과 욜로의 결합으로 표현한다. 일상에서는 철저히 가성비를 따지지만, 자신을 표현하거나 기억에 남는 경험에는 기꺼이 돈을 쓴다는 것이다. 볼꾸와 다꾸는 흥미롭게도 이 두 영역의 특성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일단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에, 가성비 구조 안에 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나만의 것’, ‘나를 보여주는 것’이자, 하루를 기억하게 해주는 경험으로 기능한다.이런 소비는 ‘큰 건 어차피 내 마음대로 안 되니, 작은 것만이라도 내 취향대로’라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볼꾸 매장에 재방문이 잦다는 점이다. 같은 가격으로 계속 새로운 콘셉트를 시도할 수 있다는 건, 반복 가능한 소확행 구조를 제공한다. 여행이나 큰 소비는 한 번에 많은 자원을 쓰기 때문에 자주 할 수 없다. 하지만 볼꾸나 다꾸 같은 ‘작은 소비–작은 만족’ 구조는, 일상의 루틴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이 루틴은 불안정한 현실에서 사람들을 버티게 하는, 작은 반복 의식이 된다.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욕구도 꾸미기 문화 확산의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디지털 피로를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시간으로 회복하려는 것이다.디지털 캘린더, 메모 앱이 일상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MZ세대는 일부러 종이 다이어리와 손글씨를 선택한다. 소비 트렌드 전문가는 이 현상을 ‘구세대의 향수와 신세대의 호기심이 결합된 아날로그 감성의 확산’으로 설명한다.디지털 기기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쉴 틈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압박을 준다. 알림 창은 끊임없이 뜨고, 메신저는 비동기적 스트레스를 준다. 그 가운데, 다꾸를 하는 몇십 분 동안은 오로지 한 페이지에만 몰입할 수 있다. 다꾸러들은 “그 시간 동안은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저비용의 심리적 충족방법이자,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은 명상 시간이다.​볼꾸 역시 마찬가지다. 모바일 화면이 아닌, 실물 파츠를 만지고, 배열을 바꿔 보며 손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사회가 점점 더 속도와 효율을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느리고 비효율적인 활동에서 정서적 안식을 찾는다. 손으로 글씨를 쓰고, 스티커를 한 장씩 떼어 붙이고, 파츠를 돌려 끼우는 일은, 디지털 피로를 상쇄하는 촉각적 경험이다.​마지막으로, 볼꾸와 다꾸는 일상의 불안을 위로해 주는, 손안에 쥘 수 있는 부적이 필요한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볼펜과 다이어리는 손안에 쥘 수 있고, 매일 들고 다니는 물건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불안정한 미래와 경쟁의 압박 속에서 일종의 심리적 부적을 필요로 한다. 좋아하는 캐릭터 비즈가 달린 볼펜, 정성 들여 꾸민 다이어리는 그 자체로 작은 부적처럼 작동한다.다이어리를 오랫동안 꾸며온 사람은, 다이어리가 ‘친구들과의 시간을 기억해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힘들었던 날, 좋은 날,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갔는지가 다이어리 속에 붙어 있다. 그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살았다!”라는 감각을 얻는다. 볼펜도 마찬가지다. 수업 시간, 회의실, 카페에서, 손에 쥔 볼펜은 자신을 알아 봐주는 조용한 동료다. 타인의 요구와 평가로 가득한 공간에서, 볼펜만큼은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구성된 물체다.볼꾸와 다꾸가 유행하는 시기는 우리 사회의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와 겹친다. 경기 침체, 주거 불안, 입시·취업 경쟁, 사회 갈등이 겹치며, 사람들은 거대한 구조를 바꾸는 데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 그때 ‘작고 귀여운 것’에 몰입하는 행위는, 현실 도피라기보다 생존 전략이다. 거대한 불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손이 닿는 작은 물건에 마음을 쏟으며 하루를 버틴다.이런 의미에서 볼꾸나 다꾸는 ‘키덜트(키즈+어덜트)’ 문화와도 통한다. 어린 시절의 놀이 방식을 어른이 된 뒤에도 유지하는 건, 책임과 의무로 포장된 성인 세계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결국, 볼꾸와 다꾸를 비롯한 꾸미기 트렌드는 작은 물건을 통해 삶을 다시 붙잡으려고 하는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과도한 경쟁과 차별화 강박, 가성비와 소확행, 디지털 피로와 아날로그 감성, 커뮤니티와 인증 욕구, 불안과 위로, 유동적인 정체성과 놀이로서의 자기 연출까지, 하나의 볼펜과 한 장의 다이어리 페이지 위에 꾸미기 트렌드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지 하는.그래서 볼꾸와 다꾸는, 단순히 ‘요즘 젊은이들의 귀여운 취미’로 치부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작은 물건들 안에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감정 구조와 생존 전략이 집약되어 있다. 거대한 구조를 바꾸기엔 너무 작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너무 불안한 사람들이 택한 방식. 그것이 바로, 손안에 쥔 볼펜과 다이어리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다시 붙잡는 일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 관리자
  • 26.04.15
  • 573
[Research Lounge_10]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을, 고립청년을 바라보다

필자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사연구컨설팅 올림은 ‘외로움’이나 ‘고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 사회적, 개인적 이슈로 외로움과 고립은 아마 더욱 큰 이슈가 되리라 예견하기 때문이다.대학에서 서울시 고립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시절에 함께 조사연구를 진행했던 올림으로부터 전문위원 위촉을 받고 작년 ‘수원시 사회적 고립은둔 실태조사’를 함께 진행했다.올림은 올해 2026년에도 고립과 관련된 조사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바로 ‘2026 서울 청년수당 참여자 분석 및 추적조사 연구’이다.서울시 청년수당이란,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만 19세~34세 미취업 또는 단기 근로 청년에게 활동지원금(월 50만원 최대 6개월)을 지급하고, 강점진단 종합지원, 멘토링, 취업지원 프로그램 제공 등 청년 니즈에 맞게 프로그램 연계를 지속 지원하는 사업을 말한다.(참고로 2026년 신청은 3월 13일로 종료했다. 2025년은 6월에 추가 모집이 있었다.)이번 올림이 맡아 진행하고 있는 조사연구는 2025년 청년수당 참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향후 사업에 대한 피드백을 목적으로 한다.2025년 서울시 청년수당 참여자들의 후기와 사업의 자세한 내용은 청년몽땅정보통 (https://youth.seoul.go.kr)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후기에는 ‘안정적으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진로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 진심으로 고맙다.’ 등의 지원에 대한 감사의 말들이 가득하다.청년수당 프로젝트가 고립과의 관련성을 지니게 된 것은 2025년 6월, 서울시에서 청년수당 참여자 추가(2차)모집을 하면서 우선 선발 기준을 발표했기 때문이다.당시 서울시는 신청 인원이 모집 인원보다 많은 경우, 기존의 우선 선발 기준은 서울런 참여자, 중위소득 80% 이하 단기 근로 청년, 저소득 청년(건강보험료 부과액 기준)이었는데 여기에 고립·은둔 청년이 처음으로 추가되었다.특별히 고립·은둔 청년을 우선 선발 기준으로 추가한 이유는, 취업에 의지가 있는 고립 청년들의 사회 복귀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관련하여 서울시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2024년 전국 최초의 고립·은둔 청년 전담 지원 기관인 ‘서울청년기지개센터’를 오픈한 것이다. 필자는 당시 서울시와 고립청년 관련 프로젝트를 하고 있던 차라 오픈하고 4개월이 지난 2024년 12월경에 서울청년기지개센터 센터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센터장은 오랫동안 사회복지 현장의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온 분이었는데, 취임 전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해내야 했고, 게다가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러니까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아요.”비유적인 표현이 재미있어서 함께 작은 웃음을 주고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에는 나름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이 말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문득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불쑥 판도라의 상자 말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 하는.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의 이름이다.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여자 인간을 만들라고 명했고 그 여인의 이름이 판도라였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탄생을 축하하며 상자를 주었는데,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판도라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고 만다. 그러자 상자 안에 갇혀있던 온갖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이 상자에서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지고 말았다. 판도라가 깜짝 놀라 급히 상자를 닫은 때에는 이미 인간을 괴롭히는 나쁜 것은 모두 빠져나온 뒤였지만, 희망만이 아직 상자에 남아있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상자에서 빠져나온 악들로 괴롭힘을 당해도 희망만은 절대 잃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 신화 이야기이다.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센터장님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말씀하신 건, 일을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고립 청년 지원 사업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전에는 이 일이 어렵고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상자를 열어보고 비로소 문제의 실체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라고 말이다.하지만 조금 더 생각하니 그런 의미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우릴 어려움에 빠뜨리는 것만 들어있던 건 아니다. 마지막에 남아있던 희망. 그러니까 센터장님은 이런 뜻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만 가득한 사업을 하게 되었구나’라는 기분이 들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센터의 존재와 활동으로 고립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움의 사회에 대한 희망이 존재하니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센터장님의 말씀은 바로 고립 은둔 청년의 문제를 풀어내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이야기해 준다. 문제에 접근하고 풀어내기 위해서는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상자)가 있다는 것만은 명확한데, 그 문제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풀어내기가 너무 힘들다.상자를 열어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살펴보고자 해도, 문제 자체가 너무나 복잡하고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어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실타래를 차례로 풀어나간다 해도 그 풀이 과정이 원만하지 못하고 수많은 장애를 만나게 된다. 마치 상자 속의 악들이 문제 풀이를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말이다.* 각 자료를 참조로 작성한 내용 기반의 AI 이미지그러니 고립 은둔 청년의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끈기 있게, 장기적으로, 체계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 바로 희망이다. 고립 은둔 청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희망. 그리고 고립 청년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품어야 하는 희망. 이 두 개의 희망이 만날 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의 희망이 충족되는 것은 아닐까.사실, 고립 은둔 청년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비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과 ‘손을 대도 해결의 수단이 없다’라는 것이다. 공적인 기관에서 사회문제에 대응할 때는 그 대상자의 범위가 명확해야 하고, 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대응책이 마련되어 나중에 성과를 가시화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청년 고립 은둔은 대상자의 범위가 당사자만이 아니라 부모와 학교, 직장까지 포함되어 한계를 정하기 어렵다. 또한, 고립 은둔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며, 자칫 시기를 놓치면 장기화되기도 한다. 게다가 청년의 고립 은둔을 바라보는 이해관계자의 인식 차도 크다. ‘일하고 싶지만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이라고 보는 입장과,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청년들’이라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공공연한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속수무책임을 알기에 보호자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는다. 보호자들은 나 혼자 감당하고 말면 된다. 열면 큰일 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동네에서는 자신의 아이는 집에 없는 것처럼 계속 행동한다. 그게 생활이 더 편하니까. 혹시나 “양육 방식이 나쁘고, 응석받이일 거야”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내가 죽으면 아이는 어떻게 되지? 주변 사람들도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다. 내가 없으면 저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누가 감당해 주나? 이제 그 상자를 혼자가 아니라 같이 열어보자. 서울청년기지개센터와 같은 곳이 그 희망의 역할이 되어줄 것이다.그리고 또 하나.결국, 고립과 은둔이란 주변의 관심으로 녹아내릴 수 있는 얼음벽이 아닐까 한다.조사연구컨설팅 올림은 조사연구기업으로써 어떻게 이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벽으로 녹일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다.그리고 고립과 은둔 관련된 조사연구 프로젝트를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바로 얼음벽을 녹이는 손길이라고 생각한다.‘[Research Lounge_3] 사회적 고립, 조사도 연결이다’ 편에서 다루었듯이, 고립청년의 모습을 잘 이해하는 정보를 발굴하고, 청년들에게 사회적 관심을 전달하는 한편, 그들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조사라는 고리로 연결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조사회사가 청년고립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 이완정_『외로움의 함정』 저자/(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 관리자
  • 26.04.08
  • 538
[Trend Insight_10] 운명과 알고리즘의 시대, 나는 누구인가를 묻다

3월 초, 신점, 사주, 타로, 관상 등의 운명술사들이 모여 여러 미션을 거쳐 운명을 가장 잘 읽어낸 최후의 1인을 뽑는 OTT의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출연자들과 관련된 문제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운명과 점술이라는 대중적 호기심을 서바이벌 구조와 결합해 몰입감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면서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하면서 흥행에서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21세기의 오늘은 가장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상이다. 종교의 영향력도 약해진 덕분인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다면 자신의 DNA를 분석해보는 편이 가장 빠를지도 모르는 세상이다.그런데도 이런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현대인은 아주 아주 오래전, 인간이 샤먼이라는 존재를 통해 하늘과 소통하고, 하늘을 뜻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운명과 사회의 안위를 점쳤던 시절의 심리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는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운명과 점술의 연결성이 대중에게 화제가 되는 까닭도 짐작이 간다. 주식시장의 지수를 보면 급등과 급락을 번갈아 오고 가는 세상이다.분명 어제까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건만, 한참이나 떨어진 나라에서 터진 전쟁으로 한순간 바닥을 친다.자연재해가 더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어떤 지역에서는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나고, 태풍이 덮쳐오고, 폭우로 집과 도로와 생명이 쓸려가기도 한다.예기치 못한 테러도 사망자가 나오고, 총기 사고로 학생과 선생님이 죽기도 한다.우리 주변은 또 어떤가. 사건사고는 뉴스 시간을 다 채울만큼 빈번하게 일어난다.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꿈꾸지만 그저 바람일 뿐이다.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내가 아무리 대비하고 예상한다고 해서 그대로 내 앞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도대체 내 앞날은 어떻게 되는 거야?’라는 예측 가능성이 50%를 넘을까 말까한 세상인 셈이다.이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운명을 알고 싶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니 ‘운명 탐구의 대중화’는 어쩌면 당연한 트렌드가 되어 버렸다.여기에 하나 더 요인이 가세한다.바로 ‘자기 이해의 욕망’이 그 어느 시대와 사회보다 높아졌다는 점이다.이제 자신의 MBTI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시대이다. 물론 MBTI에서 말하는 T나 J가 어떤 의미인지도 상식적으로 알아야 한다.TV 예능에서도 초면의 연예인들이 만나면 인사말로 MBTI가 뭐냐고 물어보는 시대이다.그런데 여기에 타로가, 사주가, 신점이 덧붙여졌다. 누군가 내 손목을 잡고 말한다.“요즘엔 MBTI보다 사주가 더 정확하대.”나는 웃지만, 그 말이 어쩐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MBTI, 타로, 혈액형, 별자리, 사주… 이름은 달라도, 결국 모두 ‘나를 알기 위한 지도’들이다. 사람들은 그 지도를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오래전에는 점집 골목 입구의 촛불 아래서 물었고, 지금은 알고리즘이 추천한 유튜브 타로 리딩을 보며 묻는다.“나는 누구인가?”“앞으로의 나는 어떤 길을 걸을까?”* AI 생성 image코로나 이후 세상의 속도는 느려졌지만, 인간이 느끼는 불안의 속도는 더 빨라진 듯하다.구조조정 뉴스, 부동산 하락, 기술 일자리의 재편, 일자리를 AI가 대체할 것이라는 불안 등등.우리의 경제적 안정감은 모래 위에 그린 선처럼 쉽게 무너진다.신체적 안정감은 또 어떤가. 크게는 핵무기로 위협하는 전쟁의 불안에서 시작해서, 지나가다 눈이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 쳐맞을 수도 있는 불안이 상존한다.심리적인 안정감과 관계적인 안정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외로움과 우울감은 이미 사회가 관리해야 하는 품목이 되었다. 이렇게 상시 우리는 머리 위에 불안이라는 물풍선을 이고 다니고 있다. 언제라도 쉽게 톡 하고 건드리면 터지고 마는. 그러니 이런 불안 속에서 우리는 통제 가능한 무언가를 원한다.그리고 ‘나의 운명, 너의 운명, 세상의 운명을 안다는 기분’은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사주나 MBTI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을 이해 가능한 구조로 압축시키는 프레임을 주기 때문이다. 모호한 미래를 하나의 서사로 재정렬해 주는 것, 그것이 현대인이 찾는 위안이다.예컨대, “나는 INFJ라서 이런 감정이야”라고 말하면 복잡한 불안을 정리된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올해는 재물운이 약하다”라고 들으면 막연한 불운이 구조화된다.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인간은 언어를 통해 혼란을 줄이고 싶어 한다.그리고 그 언어가 과학적이든 신화적이든, 중요한 건 정서적 설득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불확실성의 시대에 운명의 언어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과거의 은밀한 신앙이 이제는 대중의 오락으로 변한 점을 들 수 있다.OTT에 등장한 무속 서바이벌은 바로 이런 문화 변화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신내림, 굿, 염주, 신단 같은 이미지가 화려한 연출 속에서 재구성되며, 젊은 세대는 그것을 낯설지 않게 소비한다.이런 ‘무속의 대중적 소비’에 영향을 미친 것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일부 매니어층에서만 주로 소비되었던 소위 ‘오컬트 영화’가 이제는 다크 판타지, 초자연 스릴러라는 이름으로 확대되면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우리나라에서도 ‘곡성’ ‘검은 사제들’ ‘사바하’ 그리고 ‘파묘’로 이어지는 오컬트 영화는 흥행면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이제는 당당히 메인 장르로 자리잡았다.오컬트 영화나 드라마에게 최적의 매체인 OTT는 안방에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를 통해 서양의 전통적인 악마 퇴마 소재부터 동양의 무속신앙, 풍수지리를 다룬 작품까지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의 오컬트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이다.이런 오컬트 영화의 인기에 대해 ‘콘텐츠 다양화’나 ‘문화 호기심’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좀 더 깊게 보면 집단적 불안의 해소 방식이 엔터테인먼트화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현실에서 할 수 없는 선택의 책임을, 누군가 대신 내려주는 ‘신의 목소리’에 위탁하는 셈이다.흥미로운 건, 이 오락적 무속이 일상적 언어로 번역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점이다. “그건 네 기운이 막혔어.”“요즘 나도 신 받았나 봐.”이런 표현들은 반쯤은 장난 같고, 반쯤은 진심이다.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은유적 통제 환상(metaphoric control illusion)’으로, ‘내 삶을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설명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방어적으로 작동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현대판 사주라고 불러도 무방한 MBTI의 유행도 사실 은유적 통제 환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다만 ‘점술서’를 읽던 사람들이 이제 ‘심리 분석 리포트’를 보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나에 대해, 내 운명에 대해, 내 삶에 대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MBTI에 투영된 것일 뿐이다.MBTI의 해석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MBTI는 즉각적인 해설을 덧붙여준다.“난 T형이라 감정적인 말 못 해.”“INFP는 답장 늦는 거 기본.”이런 말은 자기 성격에 대한 해석이자, 동시에 관계의 방어막이 된다. ‘나’를 분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를 정당화하는 프레임’으로 쓰이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정체성 내러티브(self-narrative) 의 한 형태다.즉, 불완전한 나를 하나의 서사적 설명으로 엮을 수 있을 때, 사람은 안심한다.그리고 MBTI는 정확히 그 자리를 차지했다. 데이터적 언어(심리검사 결과)와 신화적 욕망(운명 탐구)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 이 데이터화된 운명이야말로 21세기형 ‘현대 점성술’이라 부를 수 있다.흥미로운 건 이제 무속도 ‘취향’의 언어로 소비된다는 것이다.“나는 타로 좋아하지만 사주는 믿지 않아.” “저 신점 유튜버는 감이 좋더라.”이 문장은 신앙이라기보다 팬덤의 언어에 가깝다.즉, 믿음’이 아니라 선호의 방식으로 운명이 다루어진다.사회문화학자들은 이를 신앙의 세속화(entertainment secularization) 라고 부른다. 종교적 패턴이 감성적 놀이로 해체되고, 사람들이 신을 믿기보다 콘텐츠로 향한다는 의미다.그래서 오늘날의 ‘무속 예능 서바이벌’은 아이돌 리얼리티와 구조적으로 닮았다. 출연자 간의 긴장, 서열, 각본, 심지어 승천이나 탈락 같은 개념까지.운명은 이제 이야기 구조의 일부다.무속이든 MBTI이든, 아니면 AI의 분석이든 결국은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게 될까?’는 묻는 욕망이 기저에 있을 것이다.그리고 어쩌면 지금 그 중심에는 외로움이 있을지도 모른다.사람들은 타인에게서, 혹은 신에게서 자신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 바로 그 이유로 MBTI를 공유하고, 사주를 함께 보고, 타로를 뽑는 건 아닐까.그것은 마치 공감의 의식처럼 느껴진다.“너는 이런 사람이구나.”“그래서 힘들었구나.”내가 운명과 알고리즘의 시대에서 듣고 싶은 건, 이 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현대의 운명론은 새삼스러울 만큼 인간적이다.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누군가의 언어로 다정히 해석되길 원한다.신의 말이든, 알고리즘의 말이든, 그것이 내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다면 말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 관리자
  • 26.04.01
  • 459
[Research Lounge_9] <왕과 사는 남자>로 배우는 공감 언어 능력의 필요

우리는 어떤 것을 가지고 ‘한국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느끼는 걸까?얼마 전 끝난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를 함께 응원하는 모습일 수도, 해외에 나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태극기일 수도, BTS를 보려 해외에서 몰려오는 외국인들을 다룬 기사에서 느끼는 뿌듯함일 수도 있다. 결국, ‘한국 사람인 우리’라는 동질성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런 사회와 문화의 공통적 체험이 아닐까 한다.이 컬럼을 쓰는 지금 우리의 동질성을 아주 흠뻑 느낄 수 있는 공통체험으로 자리한 것이 있다. 바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다.설날 연휴 영화를 보러 다녀왔다. 배우들의 열연과 감동적 스토리, 그리고 학교에서 배웠던 가물가물한 역사를 다른 시각으로 보면서 전해지는 충격 등이 버무려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계속 생각나는 한 대사가 있었다. 단종(노산군)이 수양대군을 치러 가기 위해 유배지를 벗어나는 장면에서 엄흥도와 나눈 대화이다. 단종은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자 엄흥도가 이렇게 묻는다.“저도 그 안에 있습니까?” 아마도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이 이 대사가 참으로 감명 깊었나 보나. 어느 유력 정치인도 영화 관람 인터뷰에서 “‘저도 포함이 됩니까?’ 이 대목에서 저도 눈물이 났다”라고 말했으니 말이다.다른 말로 하자면 분명 ‘저도 그 안에 있습니까?’를 평소 사용하는 언어였다면 ‘저도 거기에 포함됩니까?’일 것이다. 영화를 봤다는 지인 몇 명에게 물어보았는데 위의 정치인처럼 ‘포함’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대사라고 기억하고 있었다.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포함되다’와 ‘그 안에 있다’는 사실 의미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단지 ‘포함되다’는 ‘포함하다’가 아닌 수동적 상태를 좀 더 강조하면서, 왠지 공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다시 말해 감정이 포함되지 않은 언어처럼 들린다.이에 반해 ‘그 안에 있다’는 ‘있다’에 방점이 찍혀서, 수동적 상태보다는 능동적 의미의 표현으로 다가온다.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어라서 딱딱하거나 공식적인 표현도 아니다. 게다가 어느 단어에 액센트를 넣느냐에 따라서도 감정을 실을 수 있는 표현이 된다. 실제로 이 대사를 말하는 유해진 배우의 얼굴을 보면 복잡한 심정을 담아 이 말을 꺼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온갖 감정이 모두 실린 대사인 셈이다.하지만 오늘 컬럼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이 물음이 아닌, 물음에 대한 답으로 단종이 말하는 대사이다.단종은 엄흥도가 “그 안에 저도 있습니까?”라 묻자, 연민, 고뇌, 슬픔, 고통, 무력함 등을 모두 담은 눈빛으로 이렇게 대답한다.“그대는… 아닌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대사는 이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나였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아마도 “당연하지. 자네도 있네.”라거나, “물론 자네도 있네.”와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물었으니 이에 대해‘YES’라고 밝히는 대답을 해 주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하지만 단종은 대답하지 않는다. 물음에 물음으로 답한다.단종과 엄흥도는 묻고 답하지 않고, 서로 묻는다. 그 물음에는 이미 모든 답이 있으니 굳이 ‘묻지도 따지도 않아도(?)’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단종과 엄흥도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왕과 촌장이 아닌 인간으로서 두 사람의 대등한 관계, 서로를 아껴주는 관계, 그리고 앞날을 예견하면서 애틋함을 지닌 관계라는 것을 깊게 느끼게 된다.관객들에게 어떤 장면, 어떤 대사보다 큰 공감을 주는 것은 바로 두 사람이 나눈 언어의 힘이다. 어떤 언어를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언어가 지닌 공감력의 크기는 차이가 있다.* AI 생성 이미지를 기반으로 작성  대학과 연구소에서 보고서를 쓰면서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 과학적 글쓰기이다. 가능하면 상대방의 머릿속에 애매한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 글쓰기를 늘 염두에 둔다.특히 신경쓰는 것은 가능한 형용사와 부사를 사용하지 않고, 숫자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근거를 반드시 밝히려고 애쓴다.감성과 감정을 중시하는 글쓰기는 일기나 에세이, 소설 등에서는 ‘지향’해야 할지 모르지만, 과학적 글쓰기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보고서는 이런 스타일의 글쓰기는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요즘 문득 그렇게 과학적 글쓰기의 신념에 맞게 정돈된 글을 읽다 보면 왠지 ‘너무 차갑기만 하고, 생활의 냄새도 나지 않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지울 수만은 없다.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쓰는 연구원들은 팩트, 숫자, 객관성이 말해주지 않는 행간의 침묵을 읽어내는 심장도 함께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공감적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의 필요성도 그런 흐름에서 시작되었다.조사회사 연구원의 책상은 대개 차가운 숫자로 가득하다. 시장 점유율의 상승폭, 브랜드 인식도의 변화율, 만족도 점수의 평균값이 결과의 형태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응답자는 사용자이자 소비자이지만, 그 이전에 한 명의 ‘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결국 연구원들은 우리가 오랫동안 객관성이라는 이름의 정답이라 믿어왔던 수 많은 숫자가 가두어 놓았던 말하는 존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찾아내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기도 한다.숫자는 현상을 지시할 뿐, 그 현상을 만든 인간의 눈물이나 설렘, 망설임까지 담아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연구원의 능력은 그 침묵하는 숫자들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복원해 내는 것, 즉 ‘타인의 목소리를 해석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 복원의 도구는 엑셀 활용 능력보다는, 바로 연구원의 감성적이고 공감적인 언어 사용 능력이 될 것이다. 조사에서 공감 언어 능력이 전략적인 무기가 되는 이유는 조사란 결국 ‘묻고 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응답자는 기계가 아니기에, 질문의 결에 따라 마음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심층 인터뷰(FGI/IDI) 현장에서 연구원의 공감적 언어는 응답자의 경계심을 허물기도 한다. “귀하의 소비 패턴은 어떠합니까?”라는 건조한 질문보다, “그 제품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라는 공감적 접근은 응답자의 기억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진실을 끌어올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응답자와 조사자가 서로 공감하는 상태를 ‘라포르(Rapport)’라고 하는데, 이 공감적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응답은 천차만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응답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다. 데이터를 보니 사용자 만족도가 낮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팩트를 서술하면서 “사용자는 이 지점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는  공감적 해석을 붙인다면, 클라이언트는 비로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어디에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는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재미있는 가상적인 사례를 한번 함께 생각해 보자. 한 가전 기업으로부터 신형 세탁기 사용자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의뢰받은 연구원 최지안은 그동안 열심히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런데 클라이언트의 기대와는 달리, 30대 워킹맘들의 만족도가 예상보다 낮게 나왔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한 제품이었지만, 설문조사 결과 수치만으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사용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최지안 연구원은, 응답자들의 개방형 응답에서 언뜻 보았던 ‘오후 4시’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최 연구원은 오후 4시를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뭔가 의미를 지닌 다른 단어로 해석해 보기로 했다. 사용자들에게 오후 4시의 의미가 어떤지 스스로 사용자가 되어 공감해 보기로 한 것이다.주변 워킹맘에게 오후 4시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걱정을 하는지, 그리고 만일 본인이 집에 있다면 오후 4시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물었다.그 결과, 워킹맘에게 오후 4시는 퇴근 전 업무가 몰아치면서도 아이의 하교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 마음이 분주하고 죄책감이 고개를 드는 시간임을 알았다. 사용자의 상황과 공감대가 형성된 순간, 최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보고서 첫 페이지의 문장을 시작했다.“이 제품은 빨래를 깨끗하게 빨아주지만, 오후 4시의 불안함까지 씻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탁 완료 알림’이 아니라, ‘오늘도 수고했다’는 정서적 지지였습니다.”클라이언트는 이 문장에 감동했고, 단순한 기능 개선이 아닌, 감성적 UX 설계라는 새로운 전략을 기획하게 되었다.공감 언어 능력을 갖춘 연구원은 조직과 클라이언트에게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 될 수 있다.이를 위해 우선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구원은 분석가인 동시에 작가가 되는, 다시 말해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로 엮어낼 때, 클라이언트는 보고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될 것이다.공감적 언어는 딱딱한 제안서를 거부할 수 없는 한 편의 이야기로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다.그린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나도 그 스토리텔러 연구원이라는 범주 안에 있는가?”라고.그때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그리고 만일 이 물음을 누군가에게서 듣는다면 등을 펴서 자신 있게 “그대는 아닌가?”라고 되물을 수 있기를.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 관리자
  • 26.03.25
  • 491
[Trend Insight_9]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의 모순적 트렌드, 텍스트 힙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하지만 문장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돈다. 누군가는 책장을 넘기지 않으면서도 텍스트를 곁에 둔다. 인스타그램의 캡션, 셔츠에 새겨진 짧은 문장, 커피 컵에 프린트된 짧의 시의 구절, 그리고 밈처럼 떠도는 철학자의 한 문장. 읽는 행위는 사라졌지만, 텍스트는 여전히 유행의 한복판에 있다.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의 트렌드로 떠오른 ‘텍스트 힙(text hip)’의 모습이다.텍스트 힙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멋지다는 뜻의 ‘힙하다’를 합성한 신조어로, Z세대를 중심으로 독서와 글쓰기를 멋지고 개성 있는 트렌디한 문화로 향유하는 현상을 의미한다.과거의 힙은 새로운 음악, 낯선 향, 혹은 반짝이는 디지털 감각에 속했다. 하지만 요즘의 힙은 놀랍게도 ‘글자’에 있다. 사람들이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누군가는 책의 밑줄친 문장을 캡처해 올리고, 누군가는 책을 다 읽지 않았어도 일부 문장을 인용한다. 어떤 이는 그저 문장이 예뻐서, 문장이 주는 분위기가 좋아서 책을 사서 소장한다. 필사를 하기도 하고, 도서 전시회에 가서 멋진 문구가 적힌 에코백, T셔츠, 키링과 같은 굿즈를 사기도 한다. * AI 생성 image그렇다. 이제 문장은 더 이상 지식의 통로가 아니라 감각의 장식이 되었다.그래서 텍스트 힙 트렌드는 읽지 않는 시대의 글자 소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통계로 보자면 한국의 독서율은 매년 하락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 독서 실태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중 1년간 종이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은 32.3%에 불과하다. 10명 중 7명은 1년 내내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지표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SNS에는 끊임없이 글귀 이미지나 문학적 어구들이 떠돈다.서점은 여전히 문장을 인쇄한 굿즈로 넘쳐나고, 명품 브랜드조차 인용문 티셔츠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글이 소비되는 현상. 이 모순은 단순히 ‘읽지 않으면서 지적인 척하는 세태’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텍스트가 지식에서 감성으로, 감성에서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예전의 독서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정보를 얻고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텍스트 힙은 ‘누군가와 공감하거나 공명하기’ 위한 루틴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어쩌면 문장을 통해 생각하지 않고, 문장을 통해 분위기를 만드는 듯이.그래서 이 텍스트 힙이라는 문자 속 행간을 풀어내고 싶어지기도 한다.그러려면 우선 힙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힙하다’는 말은 원래 ‘남보다 한발 앞선 감각’을 뜻했다. 하지만 요즘의 힙은 조금 어렵게도 ‘나만 알고 있는 듯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감각’이다. 한때는 인디 음악이, 또 어떤 시기엔 빈티지 패션이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짧고 날카로운 텍스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문장은 더 이상 깊이를 통해 매혹하지 않는다. 오히려 짧고 이해하기 쉬운, 그러나 의미심장해 보이는 문장이 힙하다고 평가받는다. 예를 들자면 다음의 문장처럼.“너무 사랑해서 슬프다.”“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아마 사소했던 순간에서.”이 짧은 문장들은 수많은 피드에서 반복된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어딘가 ‘감정의 깊이’를 암시한다.* image by sewonkim from unsplash      사람들은 이 문장들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고, 또 타인을 끌어들인다. 지금 시대의 텍스트는 독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프레임이다. 그리하여 ‘읽기’보다 ‘공유하기’가 더 중요하다.그럼 왜 우리는 텍스트로 힙해지고 싶은 걸까?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적 이미지는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실제로는 긴 글을 읽을 여유가 없지만, 문장이 주는 인상은 강하다. 어떤 문장들은 무게를 지니고, 사람을 성찰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SNS에서 문장 수집을 하는 행위는, 지식인을 모방하면서도 감성을 연출하는 새로운 자기 연출법이다. 이때의 문장은 정체성의 메이크업이다. 내면의 결핍을 감추면서 동시에 감각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그러니 소비 트렌드의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 힙은 분명 심리적 보상 소비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생각할 시간은 부족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감각은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장을 품는다. 행간의 의미를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느낌’이니까.텍스트 힙을 소비자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의 이미지 소비’의 특징도 발견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텍스트를 읽는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 대상으로 소비한다. 짧은 캡션, 화면에 떠오르는 한 줄, 영상에 삽입된 문장 자막 등등. 텍스트는 이미지의 일부가 되었고, 문장은 시각적 요소로 작동한다. 글자를 읽는 행위는 장시간의 이성적 해석의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글자가 이미지로 소비되면 즉각적인 느낌에 투자되는 아주 작은 에너지만이 요구된다.이렇게 텍스트는 보여지는 시각적 언어로 진화했다. 누군가는 예쁜 손글씨로 한 문장을 쓰고, 누군가는 문장 이미지를 스토리에 올린다. 그 행동은 일종의 의식과 같다. 실제로 이해하지 않아도, 문장을 곁에 두는 행위만으로도 위로를 느낀다.이렇게 현대인은 문장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생성하고, 자신을 꾸민다. 이를 위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문장을 통해 설계한다. 문장은 그 사람의 세계관, 취향, 감정의 결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SNS 속 문장은 일종의 감정의 브랜딩, 문장으로 꾸미는 자아가 된다.그래서 각자 추구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텍스트를 선택한다. 촌스럽지 않은 감정노출을 원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구로 마음을 표현한다. 대놓고 “슬프다”고 쓰지 않고, 대신 “어제의 공기가 이상했다.”라고 말한다. 감정의 심도를 유지하면서도 세련됨을 잃지 않는 방식. 이런 언어의 절제가 ‘힙한 텍스트’의 정체인 셈이다.이 텍스트 힙의 트렌드에는 어쩌면 ‘공감 피로의 시대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현대인은 끊임없이 감정을 노출하고 공유하지만, 정작 속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피로감을 느낀다. 하지만 텍스트 힙의 짧은 문장은 이런 피로감을 우회하여 자신의 감성과 감정을 적절하게 전달해 준다. 마치 이렇게 호소하듯이.“이 한 문장으로 모든 걸 이해해줘.”그러니 공유되는 텍스트는 타인에게 보내는 간결한 신호이자, 감정을 최소한으로 번역한 언어인 셈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발신하는 언어들이 상대방에게 읽히기를 원하긴 하지만, 이 언어에 대해 굳이 설명하고 싶다는 마음은 갖지 않는다. 그래서 한마디로 텍스트 힙은 공감 피로 시대의 감정 미니멀리즘이라 할 수 있다.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를, 농축한 한 문장이 사람을 대신해 말해 준다.성인 10명 중 7명이 1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시대. 지금 우리 사회는 책을 읽는 행위는 줄었지만, 흘러가는 문장은 더 늘어났다. 흥미롭게도, 이런 빠르게 소비되는 문장들이 오히려 더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더해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마치 향수의 잔향처럼 짧은 문장이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서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텍스트 힙은 긴 문장을 읽고 문장 속의 담긴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무겁고 진지한 사유의 부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어쩌면 ‘무겁고 진지한 사유’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유를 흉내 내며, 문장을 통해 그 빈틈을 채운다. 아이러니하게도, 텍스트 힙은 사유의 모조품이자 그 갈망의 증거다.많은 사람이 “요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사실 우리는 “여전히 생각하고 싶다!”고 이렇게 텍스트 힙을 빌어서라도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긴 글 대신 짧은 문장, 이해 대신 감각, 독서 대신 수집. 텍스트 힙은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와 사회가 보여주는 사유의 마지막 흔적이자, 사유의 부재를 슬퍼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자 그럼, 우리는 검은 활자가 가득 채워진 책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걸까?2시간 영화도 2배속으로 보다보니 15분이 넘는 동영상은 시청하기 어려워 숏폼으로 핵심만 쏙쏙 빼먹는 시대. 역시 긴 호흡의 책은 과연 몇 개의 문장으로 대체되고 마는 걸까? 흥미롭게도, 텍스트 힙 덕분에 사람들은 다시 책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연예인이 읽고 있다는 책에 흥미를 느끼고, 드라마에 나오는 책을 구매하고, 화제가 되는 작가의 한마디를 찾으려고 서점이나 도서관을 찾는다. SNS에 떠있는 짧은 한 줄의 텍스트를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출처를 찾아보기도 한다.이렇게 밈으로 소비되고 있던 문장이 실제 작품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를 찾아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읽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그래서 텍스트 힙은 어쩌면 읽기의 회복을 위한 우회로일지도 모른다. 문장을 소유하려는 욕망 끝에서, 우리는 다시 이렇게 텍스트의 생명력을 만난다.책을 읽는 일이 사라져도, 텍스트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그 존재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더 이상 텍스트는 깊이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각과 이미지로 읽힌다.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리터러시일지도 모른다.바로 ‘문장을 통해 사유하지 않아도, 문장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이라는 리터러시.그렇게 텍스트는 여전히 힙하고, 텍스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언어 속에서 살고 있고 언어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 관리자
  • 26.03.18
  •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