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Insight_9]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의 모순적 트렌드, 텍스트 힙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하지만 문장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돈다. 누군가는 책장을 넘기지 않으면서도 텍스트를 곁에 둔다. 인스타그램의 캡션, 셔츠에 새겨진 짧은 문장, 커피 컵에 프린트된 짧의 시의 구절, 그리고 밈처럼 떠도는 철학자의 한 문장. 읽는 행위는 사라졌지만, 텍스트는 여전히 유행의 한복판에 있다. 몇 해 전부터 우리 사회의 트렌드로 떠오른 ‘텍스트 힙(text hip)’의 모습이다.텍스트 힙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와 멋지다는 뜻의 ‘힙하다’를 합성한 신조어로, Z세대를 중심으로 독서와 글쓰기를 멋지고 개성 있는 트렌디한 문화로 향유하는 현상을 의미한다.과거의 힙은 새로운 음악, 낯선 향, 혹은 반짝이는 디지털 감각에 속했다. 하지만 요즘의 힙은 놀랍게도 ‘글자’에 있다. 사람들이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누군가는 책의 밑줄친 문장을 캡처해 올리고, 누군가는 책을 다 읽지 않았어도 일부 문장을 인용한다. 어떤 이는 그저 문장이 예뻐서, 문장이 주는 분위기가 좋아서 책을 사서 소장한다. 필사를 하기도 하고, 도서 전시회에 가서 멋진 문구가 적힌 에코백, T셔츠, 키링과 같은 굿즈를 사기도 한다. * AI 생성 image그렇다. 이제 문장은 더 이상 지식의 통로가 아니라 감각의 장식이 되었다.그래서 텍스트 힙 트렌드는 읽지 않는 시대의 글자 소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통계로 보자면 한국의 독서율은 매년 하락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 독서 실태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중 1년간 종이책을 단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은 32.3%에 불과하다. 10명 중 7명은 1년 내내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지표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SNS에는 끊임없이 글귀 이미지나 문학적 어구들이 떠돈다.서점은 여전히 문장을 인쇄한 굿즈로 넘쳐나고, 명품 브랜드조차 인용문 티셔츠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글이 소비되는 현상. 이 모순은 단순히 ‘읽지 않으면서 지적인 척하는 세태’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텍스트가 지식에서 감성으로, 감성에서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한다.예전의 독서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정보를 얻고 지식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텍스트 힙은 ‘누군가와 공감하거나 공명하기’ 위한 루틴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어쩌면 문장을 통해 생각하지 않고, 문장을 통해 분위기를 만드는 듯이.그래서 이 텍스트 힙이라는 문자 속 행간을 풀어내고 싶어지기도 한다.그러려면 우선 힙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힙하다’는 말은 원래 ‘남보다 한발 앞선 감각’을 뜻했다. 하지만 요즘의 힙은 조금 어렵게도 ‘나만 알고 있는 듯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감각’이다. 한때는 인디 음악이, 또 어떤 시기엔 빈티지 패션이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짧고 날카로운 텍스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문장은 더 이상 깊이를 통해 매혹하지 않는다. 오히려 짧고 이해하기 쉬운, 그러나 의미심장해 보이는 문장이 힙하다고 평가받는다. 예를 들자면 다음의 문장처럼.“너무 사랑해서 슬프다.”“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괜찮다.”“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 아마 사소했던 순간에서.”이 짧은 문장들은 수많은 피드에서 반복된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어딘가 ‘감정의 깊이’를 암시한다.* image by sewonkim from unsplash 사람들은 이 문장들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고, 또 타인을 끌어들인다. 지금 시대의 텍스트는 독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의 프레임이다. 그리하여 ‘읽기’보다 ‘공유하기’가 더 중요하다.그럼 왜 우리는 텍스트로 힙해지고 싶은 걸까?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적 이미지는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실제로는 긴 글을 읽을 여유가 없지만, 문장이 주는 인상은 강하다. 어떤 문장들은 무게를 지니고, 사람을 성찰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SNS에서 문장 수집을 하는 행위는, 지식인을 모방하면서도 감성을 연출하는 새로운 자기 연출법이다. 이때의 문장은 정체성의 메이크업이다. 내면의 결핍을 감추면서 동시에 감각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그러니 소비 트렌드의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 힙은 분명 심리적 보상 소비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일상생활에서 제대로 생각할 시간은 부족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감각은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장을 품는다. 행간의 의미를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느낌’이니까.텍스트 힙을 소비자 관점에서 보면 ‘텍스트의 이미지 소비’의 특징도 발견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텍스트를 읽는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 대상으로 소비한다. 짧은 캡션, 화면에 떠오르는 한 줄, 영상에 삽입된 문장 자막 등등. 텍스트는 이미지의 일부가 되었고, 문장은 시각적 요소로 작동한다. 글자를 읽는 행위는 장시간의 이성적 해석의 에너지를 요구하지만, 글자가 이미지로 소비되면 즉각적인 느낌에 투자되는 아주 작은 에너지만이 요구된다.이렇게 텍스트는 보여지는 시각적 언어로 진화했다. 누군가는 예쁜 손글씨로 한 문장을 쓰고, 누군가는 문장 이미지를 스토리에 올린다. 그 행동은 일종의 의식과 같다. 실제로 이해하지 않아도, 문장을 곁에 두는 행위만으로도 위로를 느낀다.이렇게 현대인은 문장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생성하고, 자신을 꾸민다. 이를 위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를 문장을 통해 설계한다. 문장은 그 사람의 세계관, 취향, 감정의 결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SNS 속 문장은 일종의 감정의 브랜딩, 문장으로 꾸미는 자아가 된다.그래서 각자 추구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텍스트를 선택한다. 촌스럽지 않은 감정노출을 원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구로 마음을 표현한다. 대놓고 “슬프다”고 쓰지 않고, 대신 “어제의 공기가 이상했다.”라고 말한다. 감정의 심도를 유지하면서도 세련됨을 잃지 않는 방식. 이런 언어의 절제가 ‘힙한 텍스트’의 정체인 셈이다.이 텍스트 힙의 트렌드에는 어쩌면 ‘공감 피로의 시대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현대인은 끊임없이 감정을 노출하고 공유하지만, 정작 속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피로감을 느낀다. 하지만 텍스트 힙의 짧은 문장은 이런 피로감을 우회하여 자신의 감성과 감정을 적절하게 전달해 준다. 마치 이렇게 호소하듯이.“이 한 문장으로 모든 걸 이해해줘.”그러니 공유되는 텍스트는 타인에게 보내는 간결한 신호이자, 감정을 최소한으로 번역한 언어인 셈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발신하는 언어들이 상대방에게 읽히기를 원하긴 하지만, 이 언어에 대해 굳이 설명하고 싶다는 마음은 갖지 않는다. 그래서 한마디로 텍스트 힙은 공감 피로 시대의 감정 미니멀리즘이라 할 수 있다.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를, 농축한 한 문장이 사람을 대신해 말해 준다.성인 10명 중 7명이 1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시대. 지금 우리 사회는 책을 읽는 행위는 줄었지만, 흘러가는 문장은 더 늘어났다. 흥미롭게도, 이런 빠르게 소비되는 문장들이 오히려 더 현대인들에게 의미를 더해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마치 향수의 잔향처럼 짧은 문장이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서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이렇게 보면 텍스트 힙은 긴 문장을 읽고 문장 속의 담긴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무겁고 진지한 사유의 부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어쩌면 ‘무겁고 진지한 사유’에 대한 그리움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유를 흉내 내며, 문장을 통해 그 빈틈을 채운다. 아이러니하게도, 텍스트 힙은 사유의 모조품이자 그 갈망의 증거다.많은 사람이 “요즘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들 하지만, 과연 그럴까?사실 우리는 “여전히 생각하고 싶다!”고 이렇게 텍스트 힙을 빌어서라도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긴 글 대신 짧은 문장, 이해 대신 감각, 독서 대신 수집. 텍스트 힙은 어쩌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와 사회가 보여주는 사유의 마지막 흔적이자, 사유의 부재를 슬퍼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자 그럼, 우리는 검은 활자가 가득 채워진 책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걸까?2시간 영화도 2배속으로 보다보니 15분이 넘는 동영상은 시청하기 어려워 숏폼으로 핵심만 쏙쏙 빼먹는 시대. 역시 긴 호흡의 책은 과연 몇 개의 문장으로 대체되고 마는 걸까? 흥미롭게도, 텍스트 힙 덕분에 사람들은 다시 책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연예인이 읽고 있다는 책에 흥미를 느끼고, 드라마에 나오는 책을 구매하고, 화제가 되는 작가의 한마디를 찾으려고 서점이나 도서관을 찾는다. SNS에 떠있는 짧은 한 줄의 텍스트를 더 깊이 알고 싶어서 출처를 찾아보기도 한다.이렇게 밈으로 소비되고 있던 문장이 실제 작품에서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를 찾아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읽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그래서 텍스트 힙은 어쩌면 읽기의 회복을 위한 우회로일지도 모른다. 문장을 소유하려는 욕망 끝에서, 우리는 다시 이렇게 텍스트의 생명력을 만난다.책을 읽는 일이 사라져도, 텍스트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그 존재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더 이상 텍스트는 깊이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감각과 이미지로 읽힌다.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리터러시일지도 모른다.바로 ‘문장을 통해 사유하지 않아도, 문장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이라는 리터러시.그렇게 텍스트는 여전히 힙하고, 텍스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언어 속에서 살고 있고 언어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