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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12] 함께 하니 즐겁지 아니한가_마라톤의 사회학

[Trend Insight_12] 함께 하니 즐겁지 아니한가_마라톤의 사회학지난 주 토요일. 아침부터 딸의 움직임이 분주하다.평소 같으면 늦잠으로 시작하는 휴일의 오전을, 어찌 된 일인지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단장하고 뭔가 부산스럽게 시작했다.아하, 오늘이 그 5km 단축 마라톤인가를 하는 날이라고 했지.5km라는 거리를 뛰는 것도 마라톤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도 의아하긴 했지만, 더 의아한 건 평소에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던 딸이 갑자기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42.195km라는 오해는 곧 풀렸지만.방에서 스트레칭 이외에는 운동과 담을 쌓고 있던 몸을 걱정해서 5km라도 힘들지 않겠냐고 물어보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힘들 거 없어. 남자친구랑 같이 뛸 거고, 뛰기 어려우면 그냥 천천히 걸어도 돼. 다른 사람들도 큰 부담없이 그냥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자고 참가하는 건데 뭐. 그리고 끝나고 맛있는 삼겹살 먹기로 했거든.”황영조, 이봉주 선수가 그 긴 거리를 고독하게 싸우면서 완주를 해내던 모습을 TV 화면으로 보았던 세대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대답이다.‘나와의 외로운 싸움’의 대명사였던 마라톤의 성격도 세월만큼이나 빠르게 변해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읽은 ‘사우나런(sauna run)’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한 아웃도어 편집숍이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모두 8차례, 함께 달린 후 텐트 사우나에서 땀을 내는 모임을 개최했는데 총 114명이 참가했다고 한다.그러니까 이제 누군가 마라톤이나 달리기를 한다는 건 승부를 보는 스포츠에서 출발해서, 건강관리나 체력단련을 거쳐, 친목과 데이트의 영역으로 진출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바야흐로 마라톤과 달리기의 사회적, 심리적 의미가 만개하는 시기가 되었다.* AI생성 이미지지난 3월 28일 경남 밀양시 밀양 강변에서는 5km 벚꽃길을 뛰면서 음식을 맛보는 ‘나이트 런 앤 워크 인 밀양’마라톤 행사가 있었다. 1km마다 놓인 음료수는 ‘땡초 물회국수’, ‘불짜장밥’과 같은 특별메뉴인데, 가족과 함께 한 참가자들은 기록이 아닌 추억을 남기느라 바빴다.같은 날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서울 유아차런’에 참가하기 위한 유모차(유아차) 4,000여 대가 모이기도 했다. 유모차를 밀고 8km를 달리는 행사인데, 서울 한복판을 언제 이렇게 걸어보겠느냐며 가족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같은 날 서울 구로구에서는 안양천 벚꽃길을 따라 5km를 완주하고 수육과 두부김치, 막걸리를 무한으로 먹을 수 있는 ‘수육런’행사가 열렸다. 동네 잔치 같은 분위기에 멀리서 온 참가자들도 많았다.이 밖에 경남 합천이 지역소멸 위기 극복을 위해 개최하는 ‘합천벚꽃마라톤대회’, 경북 의성군이 산수유 축제 기간에 개최하는 ‘의성마늘마라톤’, 경북 영주의 ‘소백산마라톤대회’를 비롯해서 ‘경주벚꽃마라톤’, ‘군산새만금마라톤’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역 마라톤 대회도 우후죽순처럼 열리고 있다.지자체에서는 특산품도 홍보하고 관광객을 늘리는 데에 러닝만 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 마라톤 참가자를 대상으로 전세 버스를 전문적으로 운행하는 상품도 등장했다고 한다.이렇게 전국으로 번져가는 마라톤 축제는 홀로 달리기를 즐기려는 개인 참가자는 물론이겠지만, 그보다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 또는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더 주목을 받고 있다.이른 아침 한강 공원.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시간인데도, 이미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각자의 속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리듬으로 발을 맞춘다. 누군가는 대화를 나누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호흡을 공유한다. 이런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최근 몇 년 사이, 달리기는 개인의 고독한 운동에서 벗어나 하나의 사회적 활동으로 변모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달리기는 오랫동안 철저히 개인적인 행위로 인식되어 왔다.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체중을 줄이기 위해, 혹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혼자 이어폰을 꽂고 달리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달리는 동안 타인과의 관계는 최소화되었고, 오히려 혼자라는 상태가 중요한 전제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의 풍경은 분명 다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혼자 잘 달리는 것’보다 ‘함께 달리는 경험’을 선택하고 있다.이 변화의 중심에는 ‘러닝 크루’라는 현상이 있다. 특정 브랜드나 조직이 아닌,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달리는 이 집단은 단순한 운동모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러닝 크루는 느슨하지만 분명한 소속감을 제공하고, 운동이라는 행위를 매개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장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단순히 달리기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감정과 정체성까지 함께 나눈다는 데 있다.* AI생성 이미지그럼 왜 사람들은 달리기를 통해 다시 ‘함께’를 선택하고 정체성을 공유할까.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공유된 경험(shared experience)’이 주는 정서적 보상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몸을 움직이는 경험은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특히 달리기처럼 일정한 리듬과 반복을 요구하는 활동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같은 페이스로 달리고, 같은 순간에 숨이 차오르며, 비슷한 지점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감각을 만들어준다. 스포츠 심리학과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동기화(Synchrony)’라고 부른다. 동기화의 힘도 러닝 크루 열풍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데, 행진하는 군인들이나 합창단, 그리고 함께 달리는 러닝 크루들은 같은 리듬을 공유하면서 심장박동이 비슷한 속도로 뛰고, 발걸음의 박자가 맞춰질 때 인간의 뇌는 옥시토신과 엔도르핀을 강력하게 분비한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우리가 ‘하나’라고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이때 중요한 것은 경쟁이 아니라 시간의 공유가 목적이라는 점이다. 과거의 스포츠가 타인과의 비교와 경쟁을 중심으로 했다면, 지금의 러닝 크루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둔다. 기록을 겨루기보다 완주를 함께 축하하고, 속도를 맞추기보다 서로의 리듬을 존중한다. 이는 성취 중심에서 경험 중심으로 이동한 현대인의 가치관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사회학적으로 보면, 러닝 크루는 현대 도시인의 ‘느슨한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 사회학자 마크 그라노베터는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gth of Weak Ties)’을 이야기했다. 끈끈하고 깊은 관계는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느슨하고 가벼운 관계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와 뜻밖의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러닝 크루가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전통적인 공동체가 약화된 이후, 사람들은 강한 책임이나 의무 없이도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를 찾기 시작했다. 러닝 크루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이상적인 형태다. 참여와 이탈이 자유롭고, 관계의 깊이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공통의 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색함 없이 관계가 시작된다.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각 지역에서 열리는 단축 마라톤 행사 역시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사회적 축제’로 기능하고 있다. 5km, 10km와 같은 비교적 짧은 거리의 대회는 진입 장벽을 낮추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경험을 제공한다. 참가자들은 기록보다 ‘그날의 분위기’를 기억하고, 완주 후의 사진과 이야기를 공유하며 그 경험을 확장한다.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달리기’가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된다는 것이다. 러닝은 이제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기록 가능한 경험이자 공유 가능한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SNS에는 러닝 크루의 단체 사진, 완주 메달, 새벽 공기의 감각까지 다양한 형태의 러닝 경험이 축적된다. 이는 개인의 일상이 타인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된다.이 현상은 ‘건강’에 대한 인식 변화와도 연결된다. 과거에는 건강이 개인의 관리 영역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타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으로 확장되고 있다. 함께 달리는 것은 단순히 운동의 지속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정서적 안정과 사회적 지지를 동시에 제공한다. 즉, 러닝 크루는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복합적인 플랫폼이 된다.또한, 러닝 크루는 현대인의 ‘정체성 실험’의 공간이기도 하다. 직장이나 가족이라는 고정된 역할에서 벗어나, ‘러너’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선택하고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체성은 비교적 가볍지만, 동시에 충분히 의미 있다. 특정 브랜드의 러닝화를 신고, 크루의 티셔츠를 입고, 정해진 시간에 모여 함께 달리는 행위는 일종의 의식처럼 반복되며 개인의 정체성을 강화한다.여기에는 ‘속도의 정치학’도 숨어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빨라져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러닝 크루에서의 속도는 다소 다르게 작동한다. 물론 여전히 기록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함께 가는 것’이다. 이는 경쟁 중심 사회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시간을 경험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결국, 함께 달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타인과의 거리를 조율하는 방식이며, 혼자와 함께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다. 완전히 고립되지 않으면서도 과도하게 얽히지 않는, 현대인이 선호하는 관계의 형태가 그 안에 담겨 있다.그래서일까. 오늘도 누군가는 이어폰을 빼고 달리기 시작한다. 혼자만의 리듬 대신, 타인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고 그 순간, 달리기는 더 이상 외로운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이자,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작은 공동체의 움직임이 된다.어쩌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달릴 것인가’보다 ‘누구와 달릴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리라 생각된다.   _ 이완정_『외로움을 소비하는 사회』 저자/(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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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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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Lounge_11] 질문에서 확신으로_리서치에 불빛을 비추는 가설

[Research Lounge_11] 질문에서 확신으로_리서치에 불빛을 비추는 가설조사라는 일은 언제나 질문에서 시작된다.“사람들의 소비 패턴은 왜 요즘 변화를 보이는 것일까?”“이 변화는 진짜 현상일까, 아니면 잠시 스쳐 지나가는 현상일까?”리서처의 하루는 이처럼 명확하지 않은 질문들과 함께 시작된다. 하지만 질문만으로는 끝까지 갈 수 없다. 세상은 너무 넓고, 데이터는 무한하다. 무엇을 먼저 보고 어디까지 파야 할지를 결정해주는 나침반이 필요하다.그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가설이다.가설은 단순한 추측도 아니지만, 맞거나 틀리는 진리의 명제도 아니다. 그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던지는 한 줄의 ‘확신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설’이라는 단어를 마주치면 언제나 숨이 턱턱 막혔던 석사 논문을 쓰던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두 음절의 단어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던지. 가설이란 도대체 어떤 놈이고,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허공에 손을 내저어 보지만 잡히는 것이 없을 때의 막연함을 그때의 기억으로 다시 떠올리게 된다.지금이야 가설이란 과학적 탐구와 연구의 핵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가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가설의 구성요소가 되는 변수(변인)은 무엇이며 어떤 특성을 지녀야 할지에 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있긴 하지만 가설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리서치 리포트를 건네받은 적이 있었다. 리포트를 좀 평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리서처가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리포트여서 따로 언급할 부분은 없었지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 만약 이 리포트를 가설을 중심으로 하는 스토리를 만들어서 구성했다면, 훨씬 클라이언트나 대중에게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더 잘 전달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마 평소에도 리서치 업무에 가설을 활용하는 것이 양질의 결과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도 높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리서치 업무에서 가설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방대한 현실을 하나의 탐색 경로로 바꿔주기 때문이다.마치 아무 정보 없이 숲을 헤매는 대신, 나뭇잎의 방향과 바람의 냄새로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가설이 없어도 조사는 원만하게 진행된다. 설문을 만들고,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면 숫자와 그래프는 결과를 그려준다. 하지만 그 조사가 누군가의 판단을 돕거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단순한 통계로는 부족하다.‘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라는 해석의 문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는 가설을 세우지 않은 조사는 풍경 사진을 찍는 일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모든 걸 담지만 초점이 없다. 반면 가설이 있는 조사는 렌즈의 조리개를 한 번 더 조정해, 그 풍경의 빛을 제대로 잡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풍경을 담는다는 점에서 둘 다 사실을 기록하지는 하지만, 후자에는 의미의 깊이가 생긴다. 우리는 그 의미의 깊이를 흔히 통찰이라고 부른다.그러니까 가설은 통찰로 이어지는 문을 열 수 있는 손잡이가 되는 셈이다. 여기서 가설이 리서치에 도움을 주는 세 가지 정도의 역할을 이야기해보고 싶다.우선, 가설은 앞서 말한 것처럼 ‘방향을 잡는 사고의 기준점’ 역할을 한다.리서치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겠을 때’이다. 이때 가설은 그 혼란을 줄인다.예를 들어, “20대 여성의 무알코올 음료 소비는 건강보다 ‘자기통제 이미지’ 욕구에서 비롯된다.”라는 가설이 있다면, 리서처는 응답 속에서 자연히 ‘통제’라는 단어를 유심히 읽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을 지니게 되면 조사결과를 해석하는 눈에도 힘이 생긴다.두 번째 역할은 ‘팀의 사고를 한 축으로 응집’하는 것이다.조사 프로젝트에서는 기획자, 분석가, 클라이언트가 각기 다른 지도를 펼쳐놓고 각자의 빨간 색연필로 지도를 칠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하지만 이럴 때, 명확한 가설이 존재한다면 논의의 초점이 그 가설에 맞춰지게 된다. 관련자들의 모든 대화는 가설을 중심으로 돌고, 각자의 지도가 아닌 하나의 지도를 펴놓고 같은 목적지를 가리키는 것처럼.그때 비로소 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팀은 ‘같은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마지막으로, 가설은 ‘리서치를 더 창의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 초기 단계에서 “직장인들이 조용한 퇴사를 꿈꾸는 이유는 단순한 번아웃이 아니라 ‘자율성 상실’ 때문일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고 하자.이 한 문장으로 조사 설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질문지에는 ‘피로도’ 대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들어가고, 인터뷰에서는 일과 자율성에 관한 정서적 표현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힘들다’라는 평범한 데이터 뒤에 감춰진 조사 대상자가 지닌 감정의 결이 드러나게 된다.그럼 한번 가상의 실제 사례를 떠올려보자.한 식품회사가 ‘자기관리형 소비자’를 타깃으로 새로운 브랜드의 간편식을 내놓았지만, 반응은 냉랭했다.처음엔 단순히 인지도나 가격 문제가 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팀 내부에서는 ‘혹시 소비자들이 이 제품을 다르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제기됐다.그래서 팀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그리곤 아래와 같은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았다.“소비자들은 이 제품을 ‘건강식’이 아니라 ‘하루를 달래는 위로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물론 그 이후에 진행되는 조사 설계도 이 가설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실제 조사에서 응답자들에게 “하루가 끝난 후 이 제품을 먹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가?”를 묻자, 놀랍게도 ‘휴식’, ‘보상’, ‘자기 위로’ 같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결국, 식품회사는 해당 브랜드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건강’에서 ‘오늘을 마무리하는 부드러움’으로 선회했고, 예상보다 훨씬 높은 공감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그날 이후, 팀은 가설을 “현상을 해석하는 문학적인 도구”로 보기 시작했다.물론 위의 사례는 가상적인, 그리고 가설을 상당히 긍정적인 도구를 본 상상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요즘 같은 넘치는 데이터 속에서, 리서처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가설의 긍정적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요즘 같은 데이터 과잉의 시대에는, 오히려 ‘무엇을 믿어야 할지’가 더 모호하기 때문이다.수많은 그래프가 의미 없이 쌓이는 가운데, 리서처가 지녀야 할 것은 분석 기술이 아니라 의도 있는 시선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가설은 바로 그 시선을 문장으로 바꾼 결과물인 것이다.“20대 남성의 65%가 비대면 결제를 선호한다.”라는 조사결과는 물론 팩트로써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이유는 여전히 숨겨져 있다.이때 “그 선호는 편의성 때문이 아니라, 관계 피로감 때문일 수 있다.”라는 한 줄의 가설이 등장하는 순간, 데이터는 해석력을 얻고, 리서치는 통찰이 된다.가설은 데이터의 침묵을 깨는 첫 번째 언어인 셈이다.이렇게 가설을 추앙하는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리서치 초보자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물론 이런 질문은 석박사 논문지도를 할 때도 수없이 들었던 것이다. 그들도 역시 연구의 초보자들이었으니까)“그런데 가설이 틀리면 실패 아닌가요?”그러나 리서치에서 가설은 맞히지 못하면 아웃이 되는 게임의 언어가 아니다. 여기에 가설에 대한 많은 사람, 심지어 석사 과정을 마친 리서처도 하는 오해가 작동한다.가설은 세울 때는 충분히 공부하고 심사숙고해서 ‘내가 공부하고 조사한 바로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그럴 것이다’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지만, 100% 진리라는 확신이 가설이 아니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통계 검증을 통해 가설을 기각하기도 하고 하는 것이다. 대학원생들도 그리고 초보 리서처들도 그래서 궁금해한다. “기각되는 가설은 쓸모없는 거 아닌가요? 제 조사나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증명이 되는 셈 아닌가요?”가설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 새로운 질문을 낳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가설이 틀렸다고, 기각되었다고 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다시 더 참에 가까운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기각된 가설은 수용되는 가설을 위한 마중물이 되어주고, 배양토가 되어준다. 다시 말해 가설은 가능하면 틀리지 않게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긴 하지만, 가설이 맞든 틀리든, 그 과정에서 얻어진 탐색의 결과가 통찰을 낳는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틀린’ 가설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준다. 그것은 문제의 본질로 향하는 징검다리인 셈이다.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보자.리서치의 세계는 냉철하다. 하지만 그 냉철함 속을 걸어가는 사람인 리서처도 결국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가설은 리서처의 감정이 다음과 같이 세상과 대화하는 언어이다.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나만의 문장은 무엇일까?”이 물음에서 리서치의 첫 불빛이 켜지는 건 아닐까.그래서 가설은 정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된다.데이터가 모호해도, 응답이 엇갈려도, 가설이 있으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확신할 수 있다.“적어도 나는 이 세상을 이렇게 이해해보기로 했다.”라고 말이다.그 한 줄의 문장이, 방대한 조사 현장을 통찰의 길로 바꾸어놓는다.가설을 리서치에 활용한다는 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일이다.그리고 그 믿음이야말로, 오늘도 리서처들이 다시 ‘다음 질문’을 준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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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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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11] 내 손 안에서 확인하는 실존 _ 볼꾸와 다꾸 이야기

[Trend Insight_11] 내 손 안에서 확인하는 실존 _ 볼꾸와 다꾸 이야기얼마 전 강의를 하러 갔다가 흥미로운 것을 마주했다. 앞자리에 앉은 수강생 한 명이 열심히 강의 내용을 필기하고 있었는데, 그의 볼펜을 보니 시판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볼펜에는 작은 캐릭터가 하나도 아니고 형형색색의 캐릭터가 대여섯 개나 붙어 있었고, 뒷부분은 키링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고리도 달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잡다한 장식품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름 예쁘게 장식을 한 특별한 볼펜이라는 느낌이었다.쉬는 시간에 “재미있고 특별한 볼펜이네요”라고 말을 건넸더니, 밝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요즘 제가 한참 볼펜 꾸미기에 빠져 있거든요. 줄여서 ‘볼꾸’라고 하는데, 여기 있는 캐릭터들이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에요.”그러고 보니 몇 년 전부터‘별다꾸’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다이어리 꾸미기인 ‘다꾸’부터, 신발 꾸미기인 ‘신꾸’, 가방 꾸미기인 ‘백꾸’, 텀블러 꾸미기인 ‘텀꾸’까지.스티커나 열쇠고리, 작은 플라스틱 장식, 캐릭터 소품 등을 이용해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표현하는 꾸미기가 MZ세대의 소비문화로 자리하면서 ‘별것을 다 꾸민다’라는 뜻으로 ‘별다꾸’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최근에는 연예인들의 포토카드나 폴라로이드 사진을 꾸미는 ‘폴꾸’나 기계식 키보드를 꾸미는 ‘키꾸’, 책상(데스크)를 꾸미는 ‘데꾸’ 등 어찌 보면 마니아틱한 꾸미기도 일종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듯하다.*AI가 만든, 좋아하는 걸그룹 굿즈로 꾸민 데꾸의 이미지두쫀쿠의 유행처럼 금방 사그라들 것처럼 보였던 이런 꾸미기 트렌드는 그 대상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처음 유행이 시작되고도 5, 6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지 않는 열기인 듯하다.그래서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왜 우리는 이것저것의 꾸미기에 열광하는지 말이다.이유 중에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우리가 소소한 일상에서 반란을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그간 고도성장기와 거대 담론의 시대를 거쳐왔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 사회는 저성장 기조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했다.미래의 거대한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청년 세대와 현대인들에게, 당장 내 손안에 쥐어진 ‘볼펜’과 ‘다이어리’와 같은 물건은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며, 나의 책상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토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볼꾸’와 ‘다꾸’, ‘데꾸’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우리는 꾸미기를 통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볼꾸와 다꾸의 유행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취미나 장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현상이 단순 ‘예쁜 것 좋아하는 MZ의 취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울 동대문종합시장 액세서리 부자재 구역에 가면, 주말도 아닌 평일 오후에 젊은 여성들, 학생들이 볼펜 몸통과 캐릭터 부품, 비즈 파츠를 고르느라 통로가 막힐 정도라고 한다. 그들이 그곳에서 구입하는 건 실용품으로서의 펜과 파츠가 아니라, 나만의 조합으로 완성된 하나의 작은 세계일 것이다.볼꾸는 기본 볼펜 몸통을 고른 뒤, 각종 캐릭터 비즈, 컬러 참, 미니 피겨를 조합해 ‘나만의 볼펜’을 만들어내는 DIY 체험 소비다. 다꾸는 다이어리 속지,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도장 등을 활용해 한 페이지를 작은 작품처럼 꾸미는 행위다. 어느 다꾸러의 표현대로, 한 장의 페이지는 “어떤 속지를 쓰고, 어떤 스티커를 어디에 붙일지”를 집요하게 고민한 끝에 완성되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기록을 남긴다’라는 기능보다 ‘나만의 구성을 창조한다’라는 경험에 더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점이다.이 작은 세계는 가격으로 보면 가벼운 장난감에 가깝다. 볼펜 몸통은 천 원 안팎, 파츠는 개당 몇백 원, 한 자루를 완성하는 데 5천 원 정도면 충분하다. 다이어리 속지와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도 개별 가격만 보면 부담이 크지 않다. 그러나 정서적인 무게로 보면, 이들의 볼펜과 다이어리는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안전한 공간이고, 나를 알아 봐주는 작은 방패이자, 온라인에서 나를 설명하는 프로필 이미지에 가깝다.꾸미기의 배경에는 과잉 경쟁과 차별화의 강박도 읽힌다. 간단히 말해 모두가 ‘그냥’은 싫은 사회의 씁씁한 모습이다.최근 볼꾸 열풍을 다룬 기사 중 눈에 띄었던 제목은 “볼펜 하나도 ‘그냥’은 안 돼!”였다. 이 문장은 우연한 수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오랜 경쟁 구조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학교에서, 취업 시장에서, 심지어 취미 생활까지 ‘그냥’은 허용되지 않는다. 남들과 비슷하게는 부족하고, 조금이라도 다르게, 더 특별하게 보여야 한다.MZ세대 소비를 분석하는 글에서도, 이들이 소비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희소성 있는 상품에 과열되다시피 하는 이유를 ‘정체성 드러내기’에서 찾는다.한정판 스니커즈나 아티스트 굿즈를 위해 줄을 서는 욕망은, 남들과는 다른 조합으로 펜을 만드는 볼꾸, 남들이 못 본 스티커·속지로 다이어리를 꾸미는 다꾸는 결국 같은 축에 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지금 우리 사회의 경쟁 구조에서 너무 쉽게 자극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더 이상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지 않다’라는 탈동질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완전히 혼자가 되기는 두렵다’라는 동조 욕구다. 볼꾸나 다꾸는 이 모순을 절묘하게 봉합한다. 모두가 ‘볼꾸 하는 중’이라는 해시태그 아래 모여 있으면서도, 각자의 펜과 다이어리는 조금씩 다르다. 비슷한 취향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미세한 차이를 내며 ‘나’를 주장할 수 있다.이런 미세한 차이에 에너지를 쏟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과도한 자기 관리와도 닿아 있다. 스펙, 외모, 말투, 취향까지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회는 ‘나를 관리하고 있다’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볼꾸나 다꾸는 이 부담스러운 자기 관리의 축을, 상대적으로 무해하고 가벼운 영역으로 옮겨버린다. 우리는 이력서와 자소서를 꾸미는 대신, 펜과 다이어리를 꾸미며 ‘나는 여전히 나를 디자인할 수 있다’라는 감각을 회복한다.하지만 무엇보다 꾸미기 트렌드는 가성비와 소확행의 결정판이기 때문에 좀처럼 식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자산 시장, 치솟는 집값, 불안정한 일자리 구조 속에서 MZ세대는 인생의 큰 레버를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주거, 직장, 경력 같은 거대 의사결정은 점점 더 운과 구조에 좌우되는 영역처럼 보인다. 이럴수록 사람들이 붙잡는 건 상대적으로 쉽게 조정 가능한, 작은 단위의 만족이다.경제·소비 전문가들은 MZ세대의 소비를 소확행과 욜로의 결합으로 표현한다. 일상에서는 철저히 가성비를 따지지만, 자신을 표현하거나 기억에 남는 경험에는 기꺼이 돈을 쓴다는 것이다. 볼꾸와 다꾸는 흥미롭게도 이 두 영역의 특성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일단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에, 가성비 구조 안에 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나만의 것’, ‘나를 보여주는 것’이자, 하루를 기억하게 해주는 경험으로 기능한다.이런 소비는 ‘큰 건 어차피 내 마음대로 안 되니, 작은 것만이라도 내 취향대로’라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볼꾸 매장에 재방문이 잦다는 점이다. 같은 가격으로 계속 새로운 콘셉트를 시도할 수 있다는 건, 반복 가능한 소확행 구조를 제공한다. 여행이나 큰 소비는 한 번에 많은 자원을 쓰기 때문에 자주 할 수 없다. 하지만 볼꾸나 다꾸 같은 ‘작은 소비–작은 만족’ 구조는, 일상의 루틴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이 루틴은 불안정한 현실에서 사람들을 버티게 하는, 작은 반복 의식이 된다.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욕구도 꾸미기 문화 확산의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디지털 피로를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시간으로 회복하려는 것이다.디지털 캘린더, 메모 앱이 일상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MZ세대는 일부러 종이 다이어리와 손글씨를 선택한다. 소비 트렌드 전문가는 이 현상을 ‘구세대의 향수와 신세대의 호기심이 결합된 아날로그 감성의 확산’으로 설명한다.디지털 기기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쉴 틈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압박을 준다. 알림 창은 끊임없이 뜨고, 메신저는 비동기적 스트레스를 준다. 그 가운데, 다꾸를 하는 몇십 분 동안은 오로지 한 페이지에만 몰입할 수 있다. 다꾸러들은 “그 시간 동안은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저비용의 심리적 충족방법이자,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은 명상 시간이다.​볼꾸 역시 마찬가지다. 모바일 화면이 아닌, 실물 파츠를 만지고, 배열을 바꿔 보며 손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사회가 점점 더 속도와 효율을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느리고 비효율적인 활동에서 정서적 안식을 찾는다. 손으로 글씨를 쓰고, 스티커를 한 장씩 떼어 붙이고, 파츠를 돌려 끼우는 일은, 디지털 피로를 상쇄하는 촉각적 경험이다.​마지막으로, 볼꾸와 다꾸는 일상의 불안을 위로해 주는, 손안에 쥘 수 있는 부적이 필요한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볼펜과 다이어리는 손안에 쥘 수 있고, 매일 들고 다니는 물건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불안정한 미래와 경쟁의 압박 속에서 일종의 심리적 부적을 필요로 한다. 좋아하는 캐릭터 비즈가 달린 볼펜, 정성 들여 꾸민 다이어리는 그 자체로 작은 부적처럼 작동한다.다이어리를 오랫동안 꾸며온 사람은, 다이어리가 ‘친구들과의 시간을 기억해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힘들었던 날, 좋은 날,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갔는지가 다이어리 속에 붙어 있다. 그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살았다!”라는 감각을 얻는다. 볼펜도 마찬가지다. 수업 시간, 회의실, 카페에서, 손에 쥔 볼펜은 자신을 알아 봐주는 조용한 동료다. 타인의 요구와 평가로 가득한 공간에서, 볼펜만큼은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구성된 물체다.볼꾸와 다꾸가 유행하는 시기는 우리 사회의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와 겹친다. 경기 침체, 주거 불안, 입시·취업 경쟁, 사회 갈등이 겹치며, 사람들은 거대한 구조를 바꾸는 데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 그때 ‘작고 귀여운 것’에 몰입하는 행위는, 현실 도피라기보다 생존 전략이다. 거대한 불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손이 닿는 작은 물건에 마음을 쏟으며 하루를 버틴다.이런 의미에서 볼꾸나 다꾸는 ‘키덜트(키즈+어덜트)’ 문화와도 통한다. 어린 시절의 놀이 방식을 어른이 된 뒤에도 유지하는 건, 책임과 의무로 포장된 성인 세계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결국, 볼꾸와 다꾸를 비롯한 꾸미기 트렌드는 작은 물건을 통해 삶을 다시 붙잡으려고 하는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과도한 경쟁과 차별화 강박, 가성비와 소확행, 디지털 피로와 아날로그 감성, 커뮤니티와 인증 욕구, 불안과 위로, 유동적인 정체성과 놀이로서의 자기 연출까지, 하나의 볼펜과 한 장의 다이어리 페이지 위에 꾸미기 트렌드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지 하는.그래서 볼꾸와 다꾸는, 단순히 ‘요즘 젊은이들의 귀여운 취미’로 치부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작은 물건들 안에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감정 구조와 생존 전략이 집약되어 있다. 거대한 구조를 바꾸기엔 너무 작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너무 불안한 사람들이 택한 방식. 그것이 바로, 손안에 쥔 볼펜과 다이어리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다시 붙잡는 일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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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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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Lounge_10]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을, 고립청년을 바라보다

[Research Lounge_10]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을, 고립청년을 바라보다필자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사연구컨설팅 올림은 ‘외로움’이나 ‘고립’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 사회적, 개인적 이슈로 외로움과 고립은 아마 더욱 큰 이슈가 되리라 예견하기 때문이다.대학에서 서울시 고립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시절에 함께 조사연구를 진행했던 올림으로부터 전문위원 위촉을 받고 작년 ‘수원시 사회적 고립은둔 실태조사’를 함께 진행했다.올림은 올해 2026년에도 고립과 관련된 조사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바로 ‘2026 서울 청년수당 참여자 분석 및 추적조사 연구’이다.서울시 청년수당이란,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만 19세~34세 미취업 또는 단기 근로 청년에게 활동지원금(월 50만원 최대 6개월)을 지급하고, 강점진단 종합지원, 멘토링, 취업지원 프로그램 제공 등 청년 니즈에 맞게 프로그램 연계를 지속 지원하는 사업을 말한다.(참고로 2026년 신청은 3월 13일로 종료했다. 2025년은 6월에 추가 모집이 있었다.)이번 올림이 맡아 진행하고 있는 조사연구는 2025년 청년수당 참여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향후 사업에 대한 피드백을 목적으로 한다.2025년 서울시 청년수당 참여자들의 후기와 사업의 자세한 내용은 청년몽땅정보통 (https://youth.seoul.go.kr)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후기에는 ‘안정적으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진로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 진심으로 고맙다.’ 등의 지원에 대한 감사의 말들이 가득하다.청년수당 프로젝트가 고립과의 관련성을 지니게 된 것은 2025년 6월, 서울시에서 청년수당 참여자 추가(2차)모집을 하면서 우선 선발 기준을 발표했기 때문이다.당시 서울시는 신청 인원이 모집 인원보다 많은 경우, 기존의 우선 선발 기준은 서울런 참여자, 중위소득 80% 이하 단기 근로 청년, 저소득 청년(건강보험료 부과액 기준)이었는데 여기에 고립·은둔 청년이 처음으로 추가되었다.특별히 고립·은둔 청년을 우선 선발 기준으로 추가한 이유는, 취업에 의지가 있는 고립 청년들의 사회 복귀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관련하여 서울시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2024년 전국 최초의 고립·은둔 청년 전담 지원 기관인 ‘서울청년기지개센터’를 오픈한 것이다. 필자는 당시 서울시와 고립청년 관련 프로젝트를 하고 있던 차라 오픈하고 4개월이 지난 2024년 12월경에 서울청년기지개센터 센터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센터장은 오랫동안 사회복지 현장의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온 분이었는데, 취임 전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해내야 했고, 게다가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러니까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아요.”비유적인 표현이 재미있어서 함께 작은 웃음을 주고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에는 나름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이 말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문득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불쑥 판도라의 상자 말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이런 비유를 하셨을까 하는.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의 이름이다.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여자 인간을 만들라고 명했고 그 여인의 이름이 판도라였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탄생을 축하하며 상자를 주었는데,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판도라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동생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고 만다. 그러자 상자 안에 갇혀있던 온갖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이 상자에서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지고 말았다. 판도라가 깜짝 놀라 급히 상자를 닫은 때에는 이미 인간을 괴롭히는 나쁜 것은 모두 빠져나온 뒤였지만, 희망만이 아직 상자에 남아있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상자에서 빠져나온 악들로 괴롭힘을 당해도 희망만은 절대 잃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 ‘판도라의 상자’ 신화 이야기이다.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센터장님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고 말씀하신 건, 일을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고립 청년 지원 사업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전에는 이 일이 어렵고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상자를 열어보고 비로소 문제의 실체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라고 말이다.하지만 조금 더 생각하니 그런 의미만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우릴 어려움에 빠뜨리는 것만 들어있던 건 아니다. 마지막에 남아있던 희망. 그러니까 센터장님은 이런 뜻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만 가득한 사업을 하게 되었구나’라는 기분이 들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센터의 존재와 활동으로 고립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외로움의 사회에 대한 희망이 존재하니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센터장님의 말씀은 바로 고립 은둔 청년의 문제를 풀어내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이야기해 준다. 문제에 접근하고 풀어내기 위해서는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상자)가 있다는 것만은 명확한데, 그 문제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풀어내기가 너무 힘들다.상자를 열어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살펴보고자 해도, 문제 자체가 너무나 복잡하고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어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실타래를 차례로 풀어나간다 해도 그 풀이 과정이 원만하지 못하고 수많은 장애를 만나게 된다. 마치 상자 속의 악들이 문제 풀이를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말이다.* 각 자료를 참조로 작성한 내용 기반의 AI 이미지그러니 고립 은둔 청년의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끈기 있게, 장기적으로, 체계적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 바로 희망이다. 고립 은둔 청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희망. 그리고 고립 청년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품어야 하는 희망. 이 두 개의 희망이 만날 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의 희망이 충족되는 것은 아닐까.사실, 고립 은둔 청년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한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비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과 ‘손을 대도 해결의 수단이 없다’라는 것이다. 공적인 기관에서 사회문제에 대응할 때는 그 대상자의 범위가 명확해야 하고, 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대응책이 마련되어 나중에 성과를 가시화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청년 고립 은둔은 대상자의 범위가 당사자만이 아니라 부모와 학교, 직장까지 포함되어 한계를 정하기 어렵다. 또한, 고립 은둔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며, 자칫 시기를 놓치면 장기화되기도 한다. 게다가 청년의 고립 은둔을 바라보는 이해관계자의 인식 차도 크다. ‘일하고 싶지만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이라고 보는 입장과,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하지 않는 청년들’이라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공공연한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속수무책임을 알기에 보호자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는다. 보호자들은 나 혼자 감당하고 말면 된다. 열면 큰일 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동네에서는 자신의 아이는 집에 없는 것처럼 계속 행동한다. 그게 생활이 더 편하니까. 혹시나 “양육 방식이 나쁘고, 응석받이일 거야”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내가 죽으면 아이는 어떻게 되지? 주변 사람들도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다. 내가 없으면 저 아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누가 감당해 주나? 이제 그 상자를 혼자가 아니라 같이 열어보자. 서울청년기지개센터와 같은 곳이 그 희망의 역할이 되어줄 것이다.그리고 또 하나.결국, 고립과 은둔이란 주변의 관심으로 녹아내릴 수 있는 얼음벽이 아닐까 한다.조사연구컨설팅 올림은 조사연구기업으로써 어떻게 이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벽으로 녹일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고 있다.그리고 고립과 은둔 관련된 조사연구 프로젝트를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바로 얼음벽을 녹이는 손길이라고 생각한다.‘[Research Lounge_3] 사회적 고립, 조사도 연결이다’ 편에서 다루었듯이, 고립청년의 모습을 잘 이해하는 정보를 발굴하고, 청년들에게 사회적 관심을 전달하는 한편, 그들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조사라는 고리로 연결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조사회사가 청년고립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 이완정_『외로움의 함정』 저자/(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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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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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nd Insight_10] 운명과 알고리즘의 시대, 나는 누구인가를 묻다

[Trend Insight_10] 운명과 알고리즘의 시대, 나는 누구인가를 묻다3월 초, 신점, 사주, 타로, 관상 등의 운명술사들이 모여 여러 미션을 거쳐 운명을 가장 잘 읽어낸 최후의 1인을 뽑는 OTT의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출연자들과 관련된 문제가 이어지기도 했지만, 운명과 점술이라는 대중적 호기심을 서바이벌 구조와 결합해 몰입감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면서 시청자의 흥미를 자극하면서 흥행에서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21세기의 오늘은 가장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상이다. 종교의 영향력도 약해진 덕분인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다면 자신의 DNA를 분석해보는 편이 가장 빠를지도 모르는 세상이다.그런데도 이런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현대인은 아주 아주 오래전, 인간이 샤먼이라는 존재를 통해 하늘과 소통하고, 하늘을 뜻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운명과 사회의 안위를 점쳤던 시절의 심리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는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운명과 점술의 연결성이 대중에게 화제가 되는 까닭도 짐작이 간다. 주식시장의 지수를 보면 급등과 급락을 번갈아 오고 가는 세상이다.분명 어제까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건만, 한참이나 떨어진 나라에서 터진 전쟁으로 한순간 바닥을 친다.자연재해가 더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어떤 지역에서는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나고, 태풍이 덮쳐오고, 폭우로 집과 도로와 생명이 쓸려가기도 한다.예기치 못한 테러도 사망자가 나오고, 총기 사고로 학생과 선생님이 죽기도 한다.우리 주변은 또 어떤가. 사건사고는 뉴스 시간을 다 채울만큼 빈번하게 일어난다.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꿈꾸지만 그저 바람일 뿐이다.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은 내가 아무리 대비하고 예상한다고 해서 그대로 내 앞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도대체 내 앞날은 어떻게 되는 거야?’라는 예측 가능성이 50%를 넘을까 말까한 세상인 셈이다.이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운명을 알고 싶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니 ‘운명 탐구의 대중화’는 어쩌면 당연한 트렌드가 되어 버렸다.여기에 하나 더 요인이 가세한다.바로 ‘자기 이해의 욕망’이 그 어느 시대와 사회보다 높아졌다는 점이다.이제 자신의 MBTI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시대이다. 물론 MBTI에서 말하는 T나 J가 어떤 의미인지도 상식적으로 알아야 한다.TV 예능에서도 초면의 연예인들이 만나면 인사말로 MBTI가 뭐냐고 물어보는 시대이다.그런데 여기에 타로가, 사주가, 신점이 덧붙여졌다. 누군가 내 손목을 잡고 말한다.“요즘엔 MBTI보다 사주가 더 정확하대.”나는 웃지만, 그 말이 어쩐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MBTI, 타로, 혈액형, 별자리, 사주… 이름은 달라도, 결국 모두 ‘나를 알기 위한 지도’들이다. 사람들은 그 지도를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오래전에는 점집 골목 입구의 촛불 아래서 물었고, 지금은 알고리즘이 추천한 유튜브 타로 리딩을 보며 묻는다.“나는 누구인가?”“앞으로의 나는 어떤 길을 걸을까?”* AI 생성 image코로나 이후 세상의 속도는 느려졌지만, 인간이 느끼는 불안의 속도는 더 빨라진 듯하다.구조조정 뉴스, 부동산 하락, 기술 일자리의 재편, 일자리를 AI가 대체할 것이라는 불안 등등.우리의 경제적 안정감은 모래 위에 그린 선처럼 쉽게 무너진다.신체적 안정감은 또 어떤가. 크게는 핵무기로 위협하는 전쟁의 불안에서 시작해서, 지나가다 눈이 마주친 모르는 사람에게 쳐맞을 수도 있는 불안이 상존한다.심리적인 안정감과 관계적인 안정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외로움과 우울감은 이미 사회가 관리해야 하는 품목이 되었다. 이렇게 상시 우리는 머리 위에 불안이라는 물풍선을 이고 다니고 있다. 언제라도 쉽게 톡 하고 건드리면 터지고 마는. 그러니 이런 불안 속에서 우리는 통제 가능한 무언가를 원한다.그리고 ‘나의 운명, 너의 운명, 세상의 운명을 안다는 기분’은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사주나 MBTI가 인기를 얻는 이유는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불확실한 세상을 이해 가능한 구조로 압축시키는 프레임을 주기 때문이다. 모호한 미래를 하나의 서사로 재정렬해 주는 것, 그것이 현대인이 찾는 위안이다.예컨대, “나는 INFJ라서 이런 감정이야”라고 말하면 복잡한 불안을 정리된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다.”올해는 재물운이 약하다”라고 들으면 막연한 불운이 구조화된다.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인간은 언어를 통해 혼란을 줄이고 싶어 한다.그리고 그 언어가 과학적이든 신화적이든, 중요한 건 정서적 설득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불확실성의 시대에 운명의 언어가 다시 돌아온 셈이다.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과거의 은밀한 신앙이 이제는 대중의 오락으로 변한 점을 들 수 있다.OTT에 등장한 무속 서바이벌은 바로 이런 문화 변화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신내림, 굿, 염주, 신단 같은 이미지가 화려한 연출 속에서 재구성되며, 젊은 세대는 그것을 낯설지 않게 소비한다.이런 ‘무속의 대중적 소비’에 영향을 미친 것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일부 매니어층에서만 주로 소비되었던 소위 ‘오컬트 영화’가 이제는 다크 판타지, 초자연 스릴러라는 이름으로 확대되면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우리나라에서도 ‘곡성’ ‘검은 사제들’ ‘사바하’ 그리고 ‘파묘’로 이어지는 오컬트 영화는 흥행면에서 크게 성공하면서 이제는 당당히 메인 장르로 자리잡았다.오컬트 영화나 드라마에게 최적의 매체인 OTT는 안방에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를 통해 서양의 전통적인 악마 퇴마 소재부터 동양의 무속신앙, 풍수지리를 다룬 작품까지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의 오컬트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이다.이런 오컬트 영화의 인기에 대해 ‘콘텐츠 다양화’나 ‘문화 호기심’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좀 더 깊게 보면 집단적 불안의 해소 방식이 엔터테인먼트화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현실에서 할 수 없는 선택의 책임을, 누군가 대신 내려주는 ‘신의 목소리’에 위탁하는 셈이다.흥미로운 건, 이 오락적 무속이 일상적 언어로 번역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점이다. “그건 네 기운이 막혔어.”“요즘 나도 신 받았나 봐.”이런 표현들은 반쯤은 장난 같고, 반쯤은 진심이다.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은유적 통제 환상(metaphoric control illusion)’으로, ‘내 삶을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설명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방어적으로 작동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현대판 사주라고 불러도 무방한 MBTI의 유행도 사실 은유적 통제 환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다만 ‘점술서’를 읽던 사람들이 이제 ‘심리 분석 리포트’를 보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나에 대해, 내 운명에 대해, 내 삶에 대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MBTI에 투영된 것일 뿐이다.MBTI의 해석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MBTI는 즉각적인 해설을 덧붙여준다.“난 T형이라 감정적인 말 못 해.”“INFP는 답장 늦는 거 기본.”이런 말은 자기 성격에 대한 해석이자, 동시에 관계의 방어막이 된다. ‘나’를 분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를 정당화하는 프레임’으로 쓰이기도 한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정체성 내러티브(self-narrative) 의 한 형태다.즉, 불완전한 나를 하나의 서사적 설명으로 엮을 수 있을 때, 사람은 안심한다.그리고 MBTI는 정확히 그 자리를 차지했다. 데이터적 언어(심리검사 결과)와 신화적 욕망(운명 탐구)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 이 데이터화된 운명이야말로 21세기형 ‘현대 점성술’이라 부를 수 있다.흥미로운 건 이제 무속도 ‘취향’의 언어로 소비된다는 것이다.“나는 타로 좋아하지만 사주는 믿지 않아.” “저 신점 유튜버는 감이 좋더라.”이 문장은 신앙이라기보다 팬덤의 언어에 가깝다.즉, 믿음’이 아니라 선호의 방식으로 운명이 다루어진다.사회문화학자들은 이를 신앙의 세속화(entertainment secularization) 라고 부른다. 종교적 패턴이 감성적 놀이로 해체되고, 사람들이 신을 믿기보다 콘텐츠로 향한다는 의미다.그래서 오늘날의 ‘무속 예능 서바이벌’은 아이돌 리얼리티와 구조적으로 닮았다. 출연자 간의 긴장, 서열, 각본, 심지어 승천이나 탈락 같은 개념까지.운명은 이제 이야기 구조의 일부다.무속이든 MBTI이든, 아니면 AI의 분석이든 결국은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게 될까?’는 묻는 욕망이 기저에 있을 것이다.그리고 어쩌면 지금 그 중심에는 외로움이 있을지도 모른다.사람들은 타인에게서, 혹은 신에게서 자신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 바로 그 이유로 MBTI를 공유하고, 사주를 함께 보고, 타로를 뽑는 건 아닐까.그것은 마치 공감의 의식처럼 느껴진다.“너는 이런 사람이구나.”“그래서 힘들었구나.”내가 운명과 알고리즘의 시대에서 듣고 싶은 건, 이 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현대의 운명론은 새삼스러울 만큼 인간적이다.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누군가의 언어로 다정히 해석되길 원한다.신의 말이든, 알고리즘의 말이든, 그것이 내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다면 말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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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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