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Insight_11] 내 손 안에서 확인하는 실존 _ 볼꾸와 다꾸 이야기얼마 전 강의를 하러 갔다가 흥미로운 것을 마주했다. 앞자리에 앉은 수강생 한 명이 열심히 강의 내용을 필기하고 있었는데, 그의 볼펜을 보니 시판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볼펜에는 작은 캐릭터가 하나도 아니고 형형색색의 캐릭터가 대여섯 개나 붙어 있었고, 뒷부분은 키링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고리도 달려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잡다한 장식품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름 예쁘게 장식을 한 특별한 볼펜이라는 느낌이었다.쉬는 시간에 “재미있고 특별한 볼펜이네요”라고 말을 건넸더니, 밝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요즘 제가 한참 볼펜 꾸미기에 빠져 있거든요. 줄여서 ‘볼꾸’라고 하는데, 여기 있는 캐릭터들이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에요.”그러고 보니 몇 년 전부터‘별다꾸’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다이어리 꾸미기인 ‘다꾸’부터, 신발 꾸미기인 ‘신꾸’, 가방 꾸미기인 ‘백꾸’, 텀블러 꾸미기인 ‘텀꾸’까지.스티커나 열쇠고리, 작은 플라스틱 장식, 캐릭터 소품 등을 이용해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표현하는 꾸미기가 MZ세대의 소비문화로 자리하면서 ‘별것을 다 꾸민다’라는 뜻으로 ‘별다꾸’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최근에는 연예인들의 포토카드나 폴라로이드 사진을 꾸미는 ‘폴꾸’나 기계식 키보드를 꾸미는 ‘키꾸’, 책상(데스크)를 꾸미는 ‘데꾸’ 등 어찌 보면 마니아틱한 꾸미기도 일종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은 듯하다.*AI가 만든, 좋아하는 걸그룹 굿즈로 꾸민 데꾸의 이미지두쫀쿠의 유행처럼 금방 사그라들 것처럼 보였던 이런 꾸미기 트렌드는 그 대상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물론, 처음 유행이 시작되고도 5, 6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지 않는 열기인 듯하다.그래서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왜 우리는 이것저것의 꾸미기에 열광하는지 말이다.이유 중에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우리가 소소한 일상에서 반란을 꿈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그간 고도성장기와 거대 담론의 시대를 거쳐왔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 사회는 저성장 기조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했다.미래의 거대한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청년 세대와 현대인들에게, 당장 내 손안에 쥐어진 ‘볼펜’과 ‘다이어리’와 같은 물건은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며, 나의 책상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토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볼꾸’와 ‘다꾸’, ‘데꾸’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우리는 꾸미기를 통해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커다란 세상이 아니라,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볼꾸와 다꾸의 유행은 겉으로 보면 단순한 취미나 장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현상이 단순 ‘예쁜 것 좋아하는 MZ의 취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울 동대문종합시장 액세서리 부자재 구역에 가면, 주말도 아닌 평일 오후에 젊은 여성들, 학생들이 볼펜 몸통과 캐릭터 부품, 비즈 파츠를 고르느라 통로가 막힐 정도라고 한다. 그들이 그곳에서 구입하는 건 실용품으로서의 펜과 파츠가 아니라, 나만의 조합으로 완성된 하나의 작은 세계일 것이다.볼꾸는 기본 볼펜 몸통을 고른 뒤, 각종 캐릭터 비즈, 컬러 참, 미니 피겨를 조합해 ‘나만의 볼펜’을 만들어내는 DIY 체험 소비다. 다꾸는 다이어리 속지,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 도장 등을 활용해 한 페이지를 작은 작품처럼 꾸미는 행위다. 어느 다꾸러의 표현대로, 한 장의 페이지는 “어떤 속지를 쓰고, 어떤 스티커를 어디에 붙일지”를 집요하게 고민한 끝에 완성되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기록을 남긴다’라는 기능보다 ‘나만의 구성을 창조한다’라는 경험에 더 강하게 끌리고 있다는 점이다.이 작은 세계는 가격으로 보면 가벼운 장난감에 가깝다. 볼펜 몸통은 천 원 안팎, 파츠는 개당 몇백 원, 한 자루를 완성하는 데 5천 원 정도면 충분하다. 다이어리 속지와 스티커, 마스킹 테이프도 개별 가격만 보면 부담이 크지 않다. 그러나 정서적인 무게로 보면, 이들의 볼펜과 다이어리는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안전한 공간이고, 나를 알아 봐주는 작은 방패이자, 온라인에서 나를 설명하는 프로필 이미지에 가깝다.꾸미기의 배경에는 과잉 경쟁과 차별화의 강박도 읽힌다. 간단히 말해 모두가 ‘그냥’은 싫은 사회의 씁씁한 모습이다.최근 볼꾸 열풍을 다룬 기사 중 눈에 띄었던 제목은 “볼펜 하나도 ‘그냥’은 안 돼!”였다. 이 문장은 우연한 수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오랜 경쟁 구조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학교에서, 취업 시장에서, 심지어 취미 생활까지 ‘그냥’은 허용되지 않는다. 남들과 비슷하게는 부족하고, 조금이라도 다르게, 더 특별하게 보여야 한다.MZ세대 소비를 분석하는 글에서도, 이들이 소비를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희소성 있는 상품에 과열되다시피 하는 이유를 ‘정체성 드러내기’에서 찾는다.한정판 스니커즈나 아티스트 굿즈를 위해 줄을 서는 욕망은, 남들과는 다른 조합으로 펜을 만드는 볼꾸, 남들이 못 본 스티커·속지로 다이어리를 꾸미는 다꾸는 결국 같은 축에 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지금 우리 사회의 경쟁 구조에서 너무 쉽게 자극되기 때문이다.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더 이상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지 않다’라는 탈동질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완전히 혼자가 되기는 두렵다’라는 동조 욕구다. 볼꾸나 다꾸는 이 모순을 절묘하게 봉합한다. 모두가 ‘볼꾸 하는 중’이라는 해시태그 아래 모여 있으면서도, 각자의 펜과 다이어리는 조금씩 다르다. 비슷한 취향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미세한 차이를 내며 ‘나’를 주장할 수 있다.이런 미세한 차이에 에너지를 쏟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과도한 자기 관리와도 닿아 있다. 스펙, 외모, 말투, 취향까지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회는 ‘나를 관리하고 있다’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볼꾸나 다꾸는 이 부담스러운 자기 관리의 축을, 상대적으로 무해하고 가벼운 영역으로 옮겨버린다. 우리는 이력서와 자소서를 꾸미는 대신, 펜과 다이어리를 꾸미며 ‘나는 여전히 나를 디자인할 수 있다’라는 감각을 회복한다.하지만 무엇보다 꾸미기 트렌드는 가성비와 소확행의 결정판이기 때문에 좀처럼 식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자산 시장, 치솟는 집값, 불안정한 일자리 구조 속에서 MZ세대는 인생의 큰 레버를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주거, 직장, 경력 같은 거대 의사결정은 점점 더 운과 구조에 좌우되는 영역처럼 보인다. 이럴수록 사람들이 붙잡는 건 상대적으로 쉽게 조정 가능한, 작은 단위의 만족이다.경제·소비 전문가들은 MZ세대의 소비를 소확행과 욜로의 결합으로 표현한다. 일상에서는 철저히 가성비를 따지지만, 자신을 표현하거나 기억에 남는 경험에는 기꺼이 돈을 쓴다는 것이다. 볼꾸와 다꾸는 흥미롭게도 이 두 영역의 특성이 동시에 들어 있다. 일단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에, 가성비 구조 안에 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나만의 것’, ‘나를 보여주는 것’이자, 하루를 기억하게 해주는 경험으로 기능한다.이런 소비는 ‘큰 건 어차피 내 마음대로 안 되니, 작은 것만이라도 내 취향대로’라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볼꾸 매장에 재방문이 잦다는 점이다. 같은 가격으로 계속 새로운 콘셉트를 시도할 수 있다는 건, 반복 가능한 소확행 구조를 제공한다. 여행이나 큰 소비는 한 번에 많은 자원을 쓰기 때문에 자주 할 수 없다. 하지만 볼꾸나 다꾸 같은 ‘작은 소비–작은 만족’ 구조는, 일상의 루틴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편입된다. 이 루틴은 불안정한 현실에서 사람들을 버티게 하는, 작은 반복 의식이 된다.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욕구도 꾸미기 문화 확산의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디지털 피로를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시간으로 회복하려는 것이다.디지털 캘린더, 메모 앱이 일상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MZ세대는 일부러 종이 다이어리와 손글씨를 선택한다. 소비 트렌드 전문가는 이 현상을 ‘구세대의 향수와 신세대의 호기심이 결합된 아날로그 감성의 확산’으로 설명한다.디지털 기기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쉴 틈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압박을 준다. 알림 창은 끊임없이 뜨고, 메신저는 비동기적 스트레스를 준다. 그 가운데, 다꾸를 하는 몇십 분 동안은 오로지 한 페이지에만 몰입할 수 있다. 다꾸러들은 “그 시간 동안은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저비용의 심리적 충족방법이자, 스스로 만들어내는 작은 명상 시간이다.볼꾸 역시 마찬가지다. 모바일 화면이 아닌, 실물 파츠를 만지고, 배열을 바꿔 보며 손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사회가 점점 더 속도와 효율을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느리고 비효율적인 활동에서 정서적 안식을 찾는다. 손으로 글씨를 쓰고, 스티커를 한 장씩 떼어 붙이고, 파츠를 돌려 끼우는 일은, 디지털 피로를 상쇄하는 촉각적 경험이다.마지막으로, 볼꾸와 다꾸는 일상의 불안을 위로해 주는, 손안에 쥘 수 있는 부적이 필요한 현대인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볼펜과 다이어리는 손안에 쥘 수 있고, 매일 들고 다니는 물건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불안정한 미래와 경쟁의 압박 속에서 일종의 심리적 부적을 필요로 한다. 좋아하는 캐릭터 비즈가 달린 볼펜, 정성 들여 꾸민 다이어리는 그 자체로 작은 부적처럼 작동한다.다이어리를 오랫동안 꾸며온 사람은, 다이어리가 ‘친구들과의 시간을 기억해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힘들었던 날, 좋은 날,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갔는지가 다이어리 속에 붙어 있다. 그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살았다!”라는 감각을 얻는다. 볼펜도 마찬가지다. 수업 시간, 회의실, 카페에서, 손에 쥔 볼펜은 자신을 알아 봐주는 조용한 동료다. 타인의 요구와 평가로 가득한 공간에서, 볼펜만큼은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구성된 물체다.볼꾸와 다꾸가 유행하는 시기는 우리 사회의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와 겹친다. 경기 침체, 주거 불안, 입시·취업 경쟁, 사회 갈등이 겹치며, 사람들은 거대한 구조를 바꾸는 데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 그때 ‘작고 귀여운 것’에 몰입하는 행위는, 현실 도피라기보다 생존 전략이다. 거대한 불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 손이 닿는 작은 물건에 마음을 쏟으며 하루를 버틴다.이런 의미에서 볼꾸나 다꾸는 ‘키덜트(키즈+어덜트)’ 문화와도 통한다. 어린 시절의 놀이 방식을 어른이 된 뒤에도 유지하는 건, 책임과 의무로 포장된 성인 세계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결국, 볼꾸와 다꾸를 비롯한 꾸미기 트렌드는 작은 물건을 통해 삶을 다시 붙잡으려고 하는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과도한 경쟁과 차별화 강박, 가성비와 소확행, 디지털 피로와 아날로그 감성, 커뮤니티와 인증 욕구, 불안과 위로, 유동적인 정체성과 놀이로서의 자기 연출까지, 하나의 볼펜과 한 장의 다이어리 페이지 위에 꾸미기 트렌드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건 아닐지 하는.그래서 볼꾸와 다꾸는, 단순히 ‘요즘 젊은이들의 귀여운 취미’로 치부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작은 물건들 안에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감정 구조와 생존 전략이 집약되어 있다. 거대한 구조를 바꾸기엔 너무 작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너무 불안한 사람들이 택한 방식. 그것이 바로, 손안에 쥔 볼펜과 다이어리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다시 붙잡는 일이다._ 박규상_사회정보학 박사/(주)조사연구컨설팅#올림 전문위원